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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Oct 15. 2021

나무들

헤세 따라하기


그 나무  밑동을 뱅 둘러 좁은 목재 벤치가 줄지어 놓였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길고 고단한 버들가지들이 사방으로 빽빽하게 깊이 드리워진 그 안은 텐트 속이나 사원처럼 영원한 그늘과 어두컴컴함에도 언제나 약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中  수양버들 -


헤세의 나무와 시가 있는 에세이집을 읽고 있는 중이다. 주변 자연과 나무들에 대한 관심과 바라보는 시간은 헤세 못지않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데 그들을 표현한 사색 가득한 문장들 사이에선 놀라움과 경이로움만 가득이다. 책을 덮고는 슬그머니 갤러리를 열어 모아둔 나무 사진을 나도 꺼내어 본다. 봄부터 무던히도 감탄하고 주변을 서성였던 수양버들 사진을. 헤세처럼 나무에 대해 말이 하고 싶어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무 이야기를.


제주도에 있어도 덕소 농장이 그리웠던 건 저 수양버들 때문이다. 앞만 보고 걷다가 축축 늘어진 가지가 정말 고단해 보여 손으로 만지다 고개를 들어보니 빙산의 일각을 만지고 있었다. 이후로 농장 입구에서부터 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아서 다른 나무들로부터 괜히 멀리 떨어져 홀로 당당하게 서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헤세 말). 수양버들이 진짜 그랬다. 그리고 멈춰 고개를 들게 만드는 이토록 큰 나무 앞에서 지나온 계절들은 온 감각으로 새겨졌다.


목화솜 이불처럼 꽃가루가 바닥을 하얗게 덮었을 때  나무 밑에서 눈은 빨개지고 코는 간지러웠다. 태양 속을 걷던 무더운 여름날, 그늘 아래로 달려들며 후회하고 있던 산책길을 달래보기도 했고. 작은 소망 운운하며 옆사람을 꼬드겨 밤길을 걸었던 그날은 습한 공기에 압도당했지만 축축 늘어진 가지 사이로 마침 차오른 휘영청 밝은 보름달에 동양화 한 폭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지. 요즘은 대낮에도 그늘이 앞쪽으로 쑥 늘어지고 선선한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솨솨 소리를 내며 맑은 시냇물 수초처럼 흐느적거린다.


헤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곁가지들은 떨어지고 오롯이 남는 어떤 장소에 대한 이미지를 나무로 기억했다. 딱히 우세한 나무 종류가 없는 도시나 풍경은 많은 추억이 있을지라도 기차 정거장처럼 낯설고 무심하게 남아 있게 된다. 반면 올리브 나무 없는 가르다 호수나 사이프러스 나무 없는 토스카나는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밤나무(책 그림에는 칠엽수)로 기억되는 슈바벤의 작은 도시에서 여드레를 묵은 이야기는 고흐의 그림 속 풍경처럼 아련하다.


그렇다면 포플러 나무는 내 고향의 이미지였다. 신작로 가로수였던 키 큰 포플러와 아이들은 나란히 걷는다. 학교길이 지루해지면 한껏 고개를 들어 눈을 찡그리고 햇살에 유난히 차랑차랑 흔들리며 빛나던 연두빛 새잎들을 바라보았다. 일찍이 그곳도 벚나무로 바뀌어 봄이면 꽃터널에 눈이 즐겁지만 어린 시절 고향마을엔 쭉쭉 뻗은 새로난 길을 닮은 포플러가 대세였다.


그런데 지난 초여름 온 동네를 넘어 면面전체를 뒤덮었던 밤꽃 향기에 취하고 온 후 묻혀졌던 이미지가 살아났다. 그래, 밤나무가 많았지. 요즘처럼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가을 아침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언제나 뒷산에 가서 밤을 줍고 학교를 갔다. 떨어진 알밤을 찾아 풀숲을 헤치면 차가운 이슬의 감촉에 묻어왔던  알싸한 향이 어디에 스며들었는지 지금도 불쑥 나타나 추억을 부른다. 서양 허브에 눈 뜬 후 민트 종류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내겐 가을 이슬의 향이다. 그때의 밤나무들은 지금도 건재하니 이젠 고향 이미지를 밤나무로 기억하련다.


또 세월이 흐르면 덕소는, 강변에 무리 지어 있는 수양버들이 아닌 농장 입구 홀로 우뚝 서 있는 수양버들로 기억될 것이다. 계획하고 온 곳이 아니라서 언젠가 또 떠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이곳을 애틋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머무는 장소, 삶 속의 섬, 헤세 이야기를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림 그리 듯 원하는 방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무는 성장한 것보다 더 깊숙이 뿌리를 박는 다는데, 뿌리를 박지 못하는 우리들은 나무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성장을 시도한다.


우리가 자신의 철없는 생각을 두려워하는 저녁때면 나무는 속삭인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긴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무는 우리보다 더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 사유의 짧음과 빠름과 아이 같은 서두름은 비할 바 없는 기쁨이 된다.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 다른 무엇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中 -









*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 안인희 옮김/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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