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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Aug 28. 2021

어르신은 잘 놀아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저녁 6시다.


경기도 시흥에서 볼일을 방금 마쳤다. 일몰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세상은 아직 환하다. 스마트폰 내비는 성북구 돈암동 집까지 두 시간이나 소요된다고 알려준다. 퇴근시간이라 도로가 가장 붐빌 시간이다. 저녁 8시까지 저녁도 못 먹고 귀소본능을 쫓아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혼자 밥 먹을 것을 각오하자 내게 많은 선택지가 생긴다. 하루 종일 고생한 태양이 넘어가는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잠시 고민했다. 소래포구에 가서 수산시장을 돌아볼까? 저녁도 해결하고... 갑자기 비릿한 냄새가 느껴진다.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근처에 지금 존재할 친구나 지인은 없다. 그리고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버렸다. 친구나 지인이 있다 해도 최소한 퇴근 한 시간 전에는 연락을 해야 한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일단 근처 할인마트를 검색했다. 모든 것을 배달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배달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와인과 맥주. 한 달에 한 번은 할인마트를 가야 하는 이유다. 10분 거리에 할인마트가 있다. 그래 일단 할인마트 가서 장도 보고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하자.


한 시간 정도 장을 보고 7층 주차장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데 건물 꼭대기층인 10층 버튼 옆에 영화관 표시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피해본 업종 중의 하나가 영화관이다. 나 역시 코로나 이후 영화관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지난주 동기 등산모임에서 친구가 영화 '모가디슈'를 봤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볼 만했다고... 쇼핑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왔다.


10층의 영화관으로 올라갈 것이냐 1층의 푸드코트로 내려갈 것이야?

혼자 선택이나 결정의 순간 어르신은 당연히 망설인다. 이럴 때 내 기준은?  

어느 것이 진부하지 않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마주한 10층의 영화관 로비는 컴컴하다. 벽과 천장이 검은색으로 되어 있고 조명도 어두웠다. 정말 오랜만이다. 2년은 확실히 넘었다. 티켓을 파는 데스크가 얼른 눈에 보이지 않는다. 로비에 사람도 몇 명 없고 2번 상영관 앞에 표검사를 위한 아르바이트생이 한 명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로비 끝에 팝콘과 음료수를 파는 곳이 보이고 아저씨 한 명이 보인다. 아저씨는 주방을 들락거리고 있다. 뭔가 할 일은 있는 모양이다. 드디어 영화 시간표가 눈에 들어온다. 팝콘 파는 아저씨 머리 위에 영화 제목과 상영시간이 보인다. 딱 20분 뒤에 모가디슈가 상영된다.


"아저씨, 표는 어디서 사나요?"

"여기서 사시면 됩니다."

"7시 45분 모가디슈 사람 많나요?"

"아니요. 자리 많습니다."

"그러면 그거 한 장 주세요."

"자리는 어디를 선택하시겠어요?" 좌석 배열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어디가 좋은지 모르니 아저씨가 적당히 알아서 주세요."

"예 그러면 G열의 5번으로 드릴게요. 여기 있습니다."

"배고픈데 요기할 만한 것이 팝콘 말고는 핫도그 밖에 없네요?"

"상영관 안에서는 음식을 드실 수 없습니다."

"예 그 정도는 알아요. 로비에서 먹으면 되죠? 콜라 작은 것과 핫도그 하나 주세요."


영화표, 핫도그, 콜라가  앞에 놓였다. 드디어 애매모호한 상황은 벗어났다. 20 내에 핫도그를 먹고 화장실 들렀다가  시간 동안 영화를 본다. 그리고 집에 가면 된다. 이렇게 모든 일정이 정해지자 마음이 편해진다.


'모가디슈'  만든 영화다.  시간 내내 다른 생각(언제 끝나나?)  없이 영상과 돌비 사운드에 몰입했다. 영화 촬영은 소말리아가 아니고 모로코에서 했다고 친구에게 들었다.    겨울에 갔던 모로코 여행(https://brunch.co.kr/@jkyoon/117 ) 새삼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30 전의 모가디슈와 지금의 카불이 오버랩되면서 영화 모가디슈는 불편하지만 진한 감동을 내게 선사했다. 30  전을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과 노력이 쏟아부어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진한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무척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몰입은 괜찮은 장편소설을 읽고  뒤의 감동과 맞먹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쉽고 짧게 영화가 짠한 감동을 주다니...


주차장을 나와 정차하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영화의 여운을 담배연기에 실어 하늘로 날렸다. 밤 열 시가 다된 하늘은 완전히 까맣다. 내비는 집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알려준다. 오늘 저녁 잘 놀았다!


어르신은 잘 놀아야 한다.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어르신은 혼자서도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두 사람 이상의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키기가 쉽지 않다. 갑자기 아주 먼 옛날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놀기 위해서는 체력도 필요하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를 쓴 김정운 교수는 노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노는 데는 체력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혼자서도 놀 수 있는 사람이 남보다 많이 놀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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