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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an 28. 2024

방랑 vs. 여행

방랑과 여행은 다르다. 여행은 목적이 있지만 방랑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 겨울이면 따뜻한 남쪽나라로 방랑을 떠난다. 방랑을 언제 떠날지 언제 결정될까? 보통 몇 달(두 달 내지 6개월) 전에 비행기표를 사면서 결정된다. 방랑은 뚜렷한 목적이 없기에 가성비 좋은 비행기표를 발견하면 방랑이 결정된다. 가성비 좋은 비행기표는 보통 취소수수료가 비싸다. 비싼 취소수수료가 아까워 웬만한 일로 결정된 방랑을 취소하지 않는다.


따뜻한 필리핀으로 12박 13일의 방랑길을 떠났다. 환갑 즈음에 명예퇴직(조기퇴직)한 선배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고, 중학교 동기동창이 숙소를 운영하고 있고, 그들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지인이 살고 있는 천사들의 도시로...


천사들의 도시(City of Angeles)는 마닐라에서 차로 두 시간 떨어져 있으나 미군의 공군기지였던 클락공항은 20분 거리다. 필리핀은 한국관광객들이 정말 많이 찾는다. 골프와 스쿠버다이빙, 도박과 유흥, 그 외에도 화산트레킹을 비롯한 즐길거리가 무수히 많다.


여행은 목적이 있기에 여행 짐은 세심하게 잘 싸야 한다. 가져갈 리스트를 만들고 두 번 이상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랑은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에 생존에 필수적인 것만 확실히 챙기면 된다. 내 경우에는 양압기, 맥북에어, 혈압약 정도다. 그리고 다시 읽고 싶은 책 두세 권이면 충분하다. 속옷이나 셔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고, 웬만한 것은 현지조달하면 된다. 그래서 이즈음 방랑길 짐은 마지막 순간에 싼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두 시간 전쯤에... 가져갈 짐을 전부 쌓아놓고 보니 가장 작은 캐리어면 충분하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작은 배낭에 딱 들어간다. 며칠 전부터 짐을 챙겨봐야 괜히 시간(인생)만 낭비하는 것 같다.


돈암동 집에서 인천공항 제2터미널이 일반 지하철(공항철도 직통열차를 이용하면 15분 절약된다)로 거의 꼬박 두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이제는 시니어패스로 무료다. 비행기 출발 네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지난 방랑길에서 처럼 사고( https://brunch.co.kr/@jkyoon/574 ) 치지 않는다면 충분하다.


공항에서 대기 중 여행자보험을 안 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르신의 꿈이 객사( https://brunch.co.kr/@jkyoon/551 )이기에 꿈이 이루어졌을 때 이를 위한 여행자보험은 들어둬야 한다. 스마트폰의 앱으로 보험을 들었다. 보장이 가장 작은 보험은 열흘에 만원 정도다. 만 79세 이상이면 보험을 받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인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보험사가 생각하나 보다.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아직 건강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남자의 평균 건강수명은 만 74세 정도다. 79세까지 여행 다닐 만큼 건강하다면 원이 없겠다. 실손보험이 있으면 보장이 달라지는지 실손보험이 있는지를 묻는다. 난 없다.


공항은 면세점으로 가득하고, 국적항공사건 LCC건 기내면세품 판매에 열심이다. 면세를 내걸고 이윤을 대폭 확보했으니 비행기 운임에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면세라는 것에 속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술과 화장품을 샀던 옛날이 생각난다. 1995년이었다. 한 해에 모스크바 출장을 네 번이나 갔기에 기억한다. 내가 탄 비행기에 패키지관광객들이 타고 있었다. 패키지 관광객들의 나이가 환갑 부근이라 생각된다. 일행에 부부동반인 것을 보니 환갑기념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기내(통로가 두 개인 광동체)에서 면세품 판매를 시작했는데, 면세품 카트가 반대편 통로에서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저것 구입하느라 카트의 진행이 좀 느렸다. 내 앞에 앉아있던 관광객 할아버지(?)가 스튜어디스에게 심하게 항의를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 사버려서 자기는 사고 싶은 것 못 사면 어떡하냐고?


그렇게 조급하시던 그 어르신은 아직도 살아계실까 궁금하네.


옛날에는 면세품 카탈로그에 술, 화장품, 향수, 담배, 초콜릿이 주를 이뤘는데 이제는 건강보조식품들이 카탈로그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오메가 3, 루테인을 비롯한 온갖 건강을 보장(?)하는 제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싱글 몰트 위스키와 와인까지 등장했고, 위스키는 예전보다 아주 다양해졌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위스키의 종류는 잉여사회( https://brunch.co.kr/@jkyoon/401 )를 떠오르게 한다. 그에 비해 화장품과 향수는 예전에 비해 아주 쪼그라들었다.


게이트를 떠나 활주로로 이동하는 택시 중에 뒤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자리에 앉으라는 사무장의 방송이 나온다. 그러더니 응급환자가 생겨서 게이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방송한다. 제법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궁금했다. 이륙하기도 전에 응급환자라니? 어르신이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했나? 결국 게이트로 다시 이동하고 남자승무원과 키가 큰 젊은 이가 복도를 따라 앞으로 이동한다. 응급환자라더니? 환자가 너무 멀쩡하다. 키는 180을 넘을 것 같다. 아마도 폐소공포증이나 공황장애가 있나 보다 했다. 보잉 737 이코노미 창가 자리에서 나도 약간의 폐소공포를 경험한 적 있다. 나중에 스튜어디스에게 물으니 그런 것 같단다. 결국 본인이 내리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공항경찰에 인계했단다.


결국 비행기는 이 소동으로 한 시간 40분 늦게 이륙했다. 네 시간도 안 되는 비행시간이지만 비빔밥을 사전주문해 놓은 것이 아주 다행이었다. 맥주 두 캔과 비빔밥을 먹느라 한 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어든 책에서 지금의 내게 아주 어울리는 구절을 맥주 마시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읽었다.


우리는 타인과 신, 그리고 최악의 경우 자신에게서도 멀어진 삶을 산다. 우리는 모두 직관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임을 우리는 안다.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안식처를 찾으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다른 식으로 그냥 내버려 둘 따름이다.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애써본들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며, 언젠가는 거룩한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머물 곳은 없다. 알든 모르든 간에 말이다.  -제임스 홀리스의 '사랑의 조건' 1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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