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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면 Oct 24. 2021

커브 길  

지도 없는 항해

-2020년 10월 12일-


버스 안에서 울고 있는데 아빠가 전화가 왔다.

속상하고, 되는 일도 없고, 아프려고 아픈 건 아닌데

출발 선부터 아니 태어날 때부터 아팠다고 하니 서러웠다.

전화기 너머 아빠가 말했다.


지금 커브 돌고 있어?


커브 길에, 너무 용쓰지 마라.



그러다 넘어져.


넘어질 각오를 하고 몸을 맡기면 오히려 안 넘어져

아빠가 살아본 인생은 그런 거더라, 그게 다야.

괜찮아, 너 잘해왔어









이 날의 일기장을 나는 딱 1년이 지나고 난 뒤 펼쳐보았다.

1만 명 중 1명이라는 확률의 병을 선고 받은 날, 나는 아주 외롭고 가난한 날들을 선고받은 사형수처럼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3개월 간은 참 많이 울었고 또 일부러 웃었고 최대한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마음으로써 이 글을 적어본다.

우선 1년의 투병 기간 동안, 나는 부풀어있던 몸이 점차 사그라드는 기적을 체험했다.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야할까 최근 병원 정기검진결과도 놀랍도록 호전된 수치를 보여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호전 사유는 병원이 아닌 한의원 쪽으로 치료 기관을 바꾼 것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내 몸보다 더 크게 병 들어 있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치유가 불가능 할 것 같았던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을 준 담당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간 마음 고생이 굉장히 많았을 것 같다는 뜻밖의 위로의 말을 들었다.



꼭 금기의 단어처럼 여겨졌던 퇴사, 홍보나 비용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치료수단에도 없었던 한의원을 찾게 된 것, 그리고 어린 시절 아주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주변에서 많은 비웃음을 샀던 가수라는 꿈을 꿈이 아닌 취미로써 당면하여 보컬취미반에 등록하게 된 것,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브런치 작가 신청, 내겐 어울리지 않는 다이어트와 식단관리를 매일 입에 달고 살게 된 것...

모두 내가 이 병을 진단받지 못했다면, 내겐 아주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여겨진 것들이다.

그리고 내가 이 병을 아주아주 싫어하지만 아주아주 좋아하게 된 수 많은 이유들이다.



어떻게 말을 맺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많이 고민하다 그냥 하고싶은 말을 하려고 한다.

올해 퇴사 후 처음 정주행한 드라마 중 <스타트 업>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몇 년만에 엄마, 언니와 한 마음으로 즐겨 본 드라마인데, 거기서 아주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대사가 있었다.  





지도 없이 떠나면 죽을 수도 있죠 근데, 살아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길을 만들죠   



 

위 문장을 축약한 대사가 드라마 후반에 정말 주구장창 나온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는 습관성 주문과도 같은 대사,

왜 쉬운 길 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느냐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도 나를 붙든 단 한 마디



나는 1만 명 중 한 명

만 명 중 한 명

만에, 하나



진짜, 만에 하나



여기까지 이 글을 읽었다면

이제 이 뒤에 따라올 문장을 채우는 일은 당신의 몫일 것이다.  



'원인 불명의 림프부종'


1년, 2년, 서서히 늘어갈 투병 일수를 알고있지만,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난치병을 앓고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유로 상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충분히 부풀어 오른 마음으로 지도 없는 근사한 항해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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