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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Oct 21. 2023

나약한 주인공으로 살기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퇴사 후 쉬면서 차츰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해 나갔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분노하고 무기력한 나를 끌어안고 스스로 낯선 세계에 발 딛으며 잊고 있던 나를 찾고 싶었다. 주로 책을 통해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 탐험했다. 산책하다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만났다. 스웨덴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재무관리사 저자 비욘이 숲 속 승려가 되어 수행자로서의 삶을 택하는 이야기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던 비욘은 꼭 나와 같았다. 그런 그가 명상을 통해 내면의 아름다움을 기르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경험담이 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처음으로 종교를 가져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가 템플스테이에 다녀와 좋았다던 말도 떠올랐다. 그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 유명 템플스테이가 아닌 내가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이었다.








 귓가엔 새소리가 들릴뿐 고요했고 여행객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덕분에 사찰 곳곳을 누비며 고즈넉한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아둘 수 있었다. 사찰을 둘러싼 풍경과 잘 가꿔진 꽃과 나무들, 그 아래 쉴 수 있는 작은 흔들의자까지. 그러다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소리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속에 나를 들어내는 것이 힘겨운 나는 어떤 얼굴들을 마주할까 조금 긴장되었다. 식당엔 스님과 보살님,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여행객. 모두 열명이 채 안되었던 것 같다. 긴장한 나와 달리, 모두들 편안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식당엔 '묵언'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붙어있었지만, 스님과 보살님은 격 없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셨고 종종 미소 띤 유쾌한 얼굴이 보였다. 벽에 붙어 있는 '묵언' 종이와 인사를 건넨 그들의 얼굴을 동시에 보며 나는 약간 혼란스러운 채 어색한 묵례를 한 후, 밥을 먹었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여렴풋이 TV에서 보던 한 스님을 떠올렸을까? 큰 대나무 몽둥이를 들고 졸면 등을 휘갈기는... 괜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 머릿속에 주체할 수 없는 많은 생각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된다.








 그렇게 멀찍이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보살님께서 타종체험을 제안하셨다. 이곳의 일정이 빡빡하지 않았기에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금종각이라는 타종체험 장소로 갔다. 나를 포함한 여행객은 3분이었고 모두 혼자 온 여성분들이었다. 연령대도 비슷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공통분모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보살님의 타종 시범을 눈여겨본 후, 나는 곧 따라 했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종 옆에 서서 커다란 나무 기둥을 맞대었더니, 두우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울림이 멀리 퍼져나갔다. 그 울림이 얼마나 웅장한지 내 몸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종과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타종을 치는 행위는 땅과 하늘의 모든 생명체를 깨우는 행위라 하셨다. 나도 잊고 있던 모든 것들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한없이 연약한 내 마음이었다. 그때 처음 내 연약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싶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스님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어릴 적 불국사 같은 유명 사찰을 갔을 때 먼발치에서 스님을 봤어도 다가가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불교 신자가 아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 스님은 너무나 멀고 낯선 대상이다.



하지만, 내 앞에 계신 스님은 달랐다. 스님은 말씀을 하시다가 이야기가 딴 길로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시며 아차 하셨고 하려던 말씀을 까먹기도 하셨다. 그 덕에 나는 긴장을 풀고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스님께 삼배하는 법을 배웠다. 알 수 없는 초월적 대상에게 절하는 행위 자체로 새롭고 낯선 경험이었다. 무릎을 꿇고 내 몸을 낮추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바닥에 떨구는 자세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닌, 내가 짊어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첫 번째 관문처럼 느껴졌다. 내 가슴을 바닥에 가까이 낮췄을 때, 내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이토록 많은가 싶었다. 타인과 세상을 향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던 내가 떠올랐다. 그것들을 내려놓기까지 앞으로 나는 더 많이 절을 올려야 할 것 같다.








 삼배를 올리고 밤늦도록 스님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스님과 처음 마주한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불편하지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님은 우리에게 편히 앉으라고 했다. 근데도 자세를 고쳐 앉지 않자, 평소에도 이렇게 움츠려 있느냐며 물었다. 그간 나를 세상과 타인에게 맞추기 위해 꾹꾹 참고, 그러다 자꾸만 움츠려버린 내가 떠올랐다. 그 태도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인이 배겼을 수도. 그래서 스님께서 툭 던진 그 질문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장난이라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덩달아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그때부터 스님이 왠지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으로 놀라기도 했다. 어쨌거나 스님 특유의 유쾌하고 수더분한 환대로 나는 편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스님은 불교문화를 책으로만 접한 나에게 부처님의 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긴 이야기 끝에 스님은 나의 근황을 물었다. 나는 잠시 쉬며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짧게 일축했다. 굳이 왜 쉬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괴롭게 하는지는 말하고 싶진 않았다.



스님은 내 짧은 대답을 듣더니 단번에 "그거 참 좋은 것이다."라고 맞장구쳐주셨다.








 어떻게 하면 잘 쉬어야 하는지. 내가 살아온 궤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할지.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지. 나는 종종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이 무색해지듯 스님은 "그거 참 좋은 것이다."라며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셨다. 이어 스님은 다 말하지 않아도 이런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긴 시간 넘치도록 해주셨다.



스님께선 잘 쉬는 것도 인생의 일부분이라며, 쉬는 것을 소비가 아니라 나를 위한 투자라고 하셨다. 아름다운 삶은 더 멀리 넓은 세상을 탐구하며 마음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때로 불안하다면 도망가도 괜찮고 도망가는 건 포기하는 것이 아닌 잠깐 멀어져 있을 뿐이라고.



"주인공으로 살아라." 나를 힘들게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들은 내 인생의 들러리다. 그러니 괴로우거든 그들로 인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지나고 보면 아등바등 고민했던 것들은 사실 별거 아니다. 아주 작은 것들이다. 그렇게 깨달음을 통해 과거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 퍽이나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저 짧은 대답 후, 스님의 말씀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 스님은 격 없이 우리를 흔쾌히 자신의 제자라고 불러주셨다. 법당에서 3시간 동안 이어진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나는 신기하게도 정신이 더 또렷해지고 맑아지는 듯했다. 물론 오랜 시간 앉아있느라 다리는 절였다.








 그 뒤로 남들이 바라는 안정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불안함을 느낄 때면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본다. 나의 번뇌를 단숨에 무색하게 하는 그 또렷한 목소리의 명쾌한 대답을.



그럼에도 종종 마음이 복잡할 때면 가까운 절에 다녀온다. 여전히 나도 모르게 괜찮은 척, 강한 척하며 사느라 애써 묻어두었던 마음이 많았던지 나는 절을 할 때면 울컥하고 눈물을 훔친다. 그렇게 여리고 나약한 내 마음이 숨 쉴 수 있게 한다. 어째 그 마음을 마주하는 건 나쁘지 않다. 그게 진짜 내 모습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낯선 세계 안에서 나약한 나를 만났다. 그간 제대로  품어주지 못한 그 마음을 감싸 안으며 또 다른 낯선 세계를 향해 아갈 준비를 한다. 낯선 세계의 나약한 주인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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