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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Oct 21. 2023

오랜 친구가 되어줘.

'열심'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아.


1. 우리 가족은______


"열심히 살았다."


한동안 침잠된 내 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상담사를 컨택해 심리검사를 받기로 했다. 내가 받은 심리검사지에 빈칸을 채워야 하는데, '우리 가족은'으로 시작한 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까. 나는 "열심히 살았다."외에 떠오르는 문장이 없었다.



작성한 검사지를 메일로 제출하고 얼마 후 상담사와 상담을 했다. 상담사는 가정환경, 가정에서 학습된 태도는 성인이 되어서도 바꾸기 쉽지 않고, 내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좀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그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가치관은 "열심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열심의 에너지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남들이 열심히 하니까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아님,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을까?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는 어떤 도덕적 잣대로부터였을까? 태생적으로 욕심, 승부욕이 많았던가? k장녀의 특징정도라 여기면 되는 것일까? 이 중에 뭐가 되었든 나에게 조금씩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째 원래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본래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어린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격 급한 부모님과 달리, 나는 느긋한 아이였다. 말을 할 땐 생각하고 천천히 말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늘 "충청도라 말이 느린가?" 수화기 너머 늘 빨리 대답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사회생활을 할 땐 내 밥 먹는 속도가 느리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먹어서 어릴 때 부모님께 많이 혼났을 것 같은데?"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속도, 쏟아 낼 수 있는 에너지가 다른데 나는 늘 '빨리빨리', '열심'의 환경에 놓였다. 내가 말하고 먹는, 일종에 내 몸의 자연스러운 일부분까지도 이 사회에 맞추려 애써야 할까?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본래의 나를 찾아가고 싶었다.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열심이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그 시절의 내 일기장에는 알록달록하고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는 내 일기장에 재밌다고 호응하며 나의 알록달록한 하루를 기다리고 응원해 주던 선생님도 사라졌다. 한순간에 무채색이 되어버린 일상이었다.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어두운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그 쳇바퀴 도는 일상으로 대학도 사회생활도 무던히 해왔지만, 내 안에 맑고 순수하고 여린 내 작은 영혼이 뾰족한 가시가 되어 "이건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듯했다. 처음 몇 번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지만 점차 몸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무기력해지길 반복하면서 고갈된 에너지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열심을 다하며 지냈다. 나는 진짜 내가 아닌, 내가 학습된 '열심'으로 늘 100%의 하루를 살았다. '열심'의 힘을 끌어모아 하나의 일을 잘 매듭지으면, 잘 해낸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일이 굴러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 생겼다. 도저히 내 일과에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좀 어려운 일을 맡게 되었는데, 기존에 맡고 있는 일들까지 모든 것이 꼬여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나의 '열심'을 더 이상 쏟아도 소용이 없고 '열심'의 에너지가 고갈되었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모르는 눈물, 내 안에 아주 깊은 곳에서 터저나온 눈물과도 같았다. 



그때 내가 믿었던 선임이 가장 먼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래. 그냥 대충 해." 


이어 내가 맡았던 일보따리를 가져가 주셨다. 상사에게 "대충 해."라는 말을 듣는 직원은 몇이나 될까. 나의 '열심'이 과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그 힘겨운 상황은 외부가 아닌 '열심'을 학습한 나에게서 비롯된 걸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일을 왜 제대로 하지 않느냐며 압박감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이건 내 안의 학습된 '열심 쳇바퀴'의 작용이었다. 









"대충 해." 


대충이라는 그 낯선 말. 나는 내가 맡은 큰 일 앞에서 어떻게 힘 빼고 대충 할 수 있는지. 나는 그 대충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대충이라.. 대충은 잘 모르겠고, 힘들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일이 있다면 그건 글쓰기와 그림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림을 좋아하던 마음을 떠올리며 '다시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일파스텔 드로잉 취미반 수업을 신청했다. 오일파스텔은 어린 시절 내가 손에 쥐던 크레파스와도 같았고 여러 미술도구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좋았다. 그렇게 퇴근 후에 방구석에서 혼자 영상을 따라 그렸고 혼자 만족해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순수하게 그냥 좋아했던 어릴 적 그 마음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내 그림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마음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내 그림을 다른 그림과 비교하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인스타 세계에 내 그림을 업로드하는 순간 타인이 나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열심' 쳇바퀴가 작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열심을 다한 결과를 어떻게 수단으로 활용할까?라는 생각에 미쳤다. 그 순간 오일파스텔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오일파스텔 도구는 내 방 한 구석에 잠들어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그냥 좋아하는 마음에 '열심'의 재를 뿌린 결과였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오일파스텔을 '그냥 꺼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열어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열심을 쏟아붓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운동이겠다. 운동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나는 땀 흘리는 운동이 그냥 싫었고 스스로 운동신경이 별볼 일 없다고 여기며 운동관련해선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다. 아니, 기대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고 운동을 잘하거나 몸매가 좋은 사람을 선망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운동은 내 관심 밖의 영역인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내 몸은 엄청 나쁘지도 않았고 체력은 그냥저냥 살만한 정도였으니 등한시 한 부분도 맞겠다. 그러다 운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살려고.'였다. 오죽 이도 몸이 좋지 않았으면 '살려고'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갑자기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며 '오늘 당장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헬스장에 가겠다고.' 맘먹었을까 싶다.  



운동을 해온 적 없는 사람이 아침에 눈떠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헬스장을 찾는 경우는 몇이나 될까. 어쨌든 '운동'이라는 낯선 세계에게 헬린이로 첫발을 디딘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동네 낯선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는 해 본 적 있나요?"


"아니요."


"다른 운동은요?"


"옛날에 문화센터에서 요가 잠깐 배운 정도요?"


"특별히 살을 빼거나 관리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아니요. 체력이 안 좋아서요.."


"어디 아픈 곳 있나요?"


"없는데요."





 



 그야말로 헬린이 다운 짧은 상담을 마치고 헬스의 세계에 입성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가꾸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다름을 느꼈다. 일단 자세부터가 달랐다. 구부러진 등, 오글아 들어 뻣뻣해진 내 어깨와 달리 그들의 몸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곧게 펴져있었다. 그들에게선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낯선 헬스세계에 처음 입성한 나는 트레이너 선생님의 코치에 의지하며 한 동작 한 동작 따라갔다.



모든 헬스기구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몸에 힘을 주어야 할 곳을 인지한 다음 적절히 몸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온몸에 힘이 들어갔고, 특히 머리 부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때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나에게 "머리에 힘 빼세요."를 수도 없이 외쳤다. 나는 머리에 힘을 준 적이 없는데 나보고 머리에 힘을 빼라는 건 너무나 어려운 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머리에 힘을 빼기 위해 시도했지만 매번 머리에 힘 빼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내가 힘을 빼야 할 곳에 힘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힘을 써야 할 곳엔 그 힘이 분산되기 일쑤였다. 그 말은 어쩐지 내 몸이 아닌, 나와 내 삶에 대고 하는 말과 같았다. 








 한 달간의 트레이닝이 끝나고 인바디를 측정했을 땐 평균이하의 기초대사량이 정상범위에 가까스로 들어왔다. 나를 한 달간 코치해 주신 트레이너 선생님께서는 마치 엄청난 일처럼 놀라워하며 이건 내가 노력한 결과라며 크게 칭찬해 주셨다. 나는 운동에 대한 별 기대가 없었기에 칭찬이 낯설어 어벙벙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운동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 여전히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놀라워한다. 그건 아마도 애초에 기대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몸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인풋을 투자하면 느리지만 정직하게 아웃풋을 냈다. 어느새 나는 운동을 엄청 좋아하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운동과 오랜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채워주는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운동이라는 그 친구로부터 얻은 건 난생처음 '건강하다는 감각'이었다. 








 분명 단짝 친구라 믿었건만, 오랜 친구가 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또는 애초에 친구가 될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영부영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친구 또한 떠올랐다. 나의 직업, 일, 취미, 관계... 어떻게 나에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들었고, 더 잘하고 싶어 에너지를 쏟아냈지만, 그만큼 돌려받지 못해 상심했다. 때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그르치기도 했는데, 마치 내 그림에 낙서한 누군가를 미워하며 세상 억울한 사람처럼 분노했다. 결국 그것들은 내가 더 잘해보려고 아등바등하면 할수록 나에게서 멀찍이 떠나갔다. 내 마음이 지쳐 떨어진 것인지, 그런 내가 질려버려서 떠나갔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나와 좋아하는 대상 간의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천천히 오래가고 싶다. 서로에게 '열심'을 쏟지 않아도, 잠시 서로가 떨어져 있어도 '네가 곁에 있어서 좋아' '나도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아.'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대상.



말없이 묵묵한 오랜 친구처럼 앞으로 내가 만날 이 낯선 세계에 천천히 느슨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렇게 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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