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19
“누가 밤사이에 우리 밭의 상추를 싹 다 뜯어가 버렸지 뭐야.”
제일 안쪽 텃밭의 할머니가 울상을 하셨다. 스무 개쯤의 작은 텃밭들은 6월이 되면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정글을 이루고 있는데 그 할머니의 텃밭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이었다. 인도 옆의 초입에 있는 나의 텃밭에도 상추는 무성한데 왜 그 안쪽까지 들어가 상추를 홀랑 뜯어갔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여긴 오히려 길가라서 다 보이니까 이렇게 상추가 잘 자랐는데도 손을 못 댔나 보네.”
할머니는 영 아쉽고 속상한 기색을 내비치며 나의 텃밭에 눈길을 두었다.
상추란 것이 비싼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쉽게 재미삼아하는 텃밭 같아 보여도 막상 키우는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비가 오면 너무 많이 올까 걱정되고, 땡볕이면 너무 뜨거울까 신경 쓰였다. 일생 농사일을 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감히 비할 바 못 되지만, 얼추 ‘가꾸는 사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이것 좀 뜯어가면 어때. 상추는 또 자랄 텐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 뜯어갔을지 모르나 그것은 가꾸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예의 없는 도둑질에 불과하다.
나는 어린 시절 수원의 세류동에서 주로 살았다. 군인관사에서 살던 그 시절, 나는 관사 밖으로 피아노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피아노는 치기 싫었으나 친구와 둘이 레슨을 받으러 오가는 길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하던 초등학생이었다.
“저 녀석들! 또 느릿느릿 색시 걸음 한다. 빨리 가서 많이 치고 오라니까.”
엄마는 늘 혀를 찼다. 하지만 엄마와 달리 친구와 나는 늦게 가서 조금 치고 오는 것이 항상 목표였으므로 세상에 급할 것 없이 걸었다.
가는 길 중간에는 튀긴 만두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우리는 늘 그 튀긴 만두를 하나씩 사 먹었다. 피아노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고 길가에 선 채로 그것을 먹느라 엄마들이 지나가며 웃으시는 것도 알지 못했다.
“빨리 가서 많이 치고 오라니까 길거리에서 그런 거나 사 먹고 다니고 말이야!”
색시 걸음으로 걷는 우리, 길에서 튀긴 만두를 사 먹느라 엄마들이 계속 쳐다보시는 것도 모르고 즐겁기만 하던 우리. 그런 우리는 두고두고 엄마들 놀림거리였다.
길거리 만둣집을 지나치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지금의 1호선 세류역 건너편쯤 되었을 것이다. 골목으로 접어들면 동네 분위기가 바뀌었다. 길거리 만두를 파는 도로변은 공군비행장 앞이어서인지 더러 음식점도 있고, 자전거 수리점, 한의원 등이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상가들이 이어졌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사뭇 풍경이 달라졌다.
낮은 담 너머로 골목에 면한 집들의 마당이 보였다. 지나가는 발소리를 듣고 어느 집 개가 컹컹대며 요란스레 짖었다. 한낮 햇볕이 좋은 날은 담벼락에 이불을 널어놓은 집도 흔했다. 그 골목 안쪽에 피아노 선생님 댁이 있었고, 그곳을 가는 중간 골목 안쪽에 작은 밭이 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채소들이 푸르게 자라는 그 밭에서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곤 깻잎뿐이었다. 심지어 나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깻잎을 참 좋아한다. 깻잎의 향도 좋고, 깻잎쌈이며 깻잎 김치도 좋아한다.
깻잎이 어린 내 손바닥보다 크게 자라나기 시작하면, 피아노를 치러 오가는 길에 그것을 몇 개씩 땄다. 깻잎을 뜯을 때 진하게 퍼지는 깻잎 향은 어린 내게 중독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잎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 치고 싶지 않은 피아노레슨받으러 가는 길도 조금 즐거워지곤 했다.
“장난으로 남이 애써 키운 먹거리를 함부로 따는 거 아니다!”
어느 날인가 내 피아노 가방을 정리해주던 엄마가 가방 안에서 튀어나온 깻잎들을 꺼내더니 잠시 후 내게 말씀하셨다. 가방에서 나온 깻잎들은 마르고 시들어 있었다. 재미로 딴 그것들은 막상 따고 난 뒤엔 가방에 넣은 채 잊었던 것이다.
엄마는 큰소리로 야단을 친 것도 아니고, 여러마디 덧붙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딱 그 한마디만을 하셨을 때, 나는 그만 움찔했다. 나 역시도 속마음은 남이 키우는 깻잎을 허락 없이 따고 다녔으니 그것 역시 도둑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뜨끔한 마음에 다시는 그 밭을 지나며 깻잎을 따지 않았다. 대신 가끔 아쉬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깻잎 냄새를 맡곤 했었다.
텃밭에서 돌아서지 못하고 여전히 속상하고 아쉬운 얼굴을 하시는 할머니를 다시 봤다. 매일 나와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대를 세우며 그 텃밭을 가꾼 시간과 거기 쏟은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듯해서 나 역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상추를 홀랑 뜯어가 버렸다는 그 누군가는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 그러니 그랬겠지, 하는 생각을 혼자 하다가 문득 어디선가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남이 애써 키운 먹거리를 함부로 따는 거 아니다.’
텃밭에서 천천히 걸어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렇게 말해줄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