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Apr 10. 2024

please!

                                  please!          

함께 모여 매주 민화 그리는 모임의 회원은 세 명이다. 말이 좋아 민화 수업이긴 하지만 실상은 취미로 놀이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답게 색칠하는 손보다 떠들고 간식을 먹는 입이 더 바쁜 시간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의 이야기를 제법 많이 듣는다.     


한 분은 남편을 따라 각국에서의 주재원 생활도 경험했을 뿐 아니라 틈틈이 지구 곳곳의 많은 나라를 여행한다. 얼마 전엔 남미로 40일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요즘 계획 세우는 다음 여행지는 부탄이라고 한다. 나에겐 참 낯선 여행지다. 

또 한 분은 영어를 배우신다. 딱히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것은 아니나 영어에 진심이다. 대부분 우리 나이에 영어를 배운다면 여행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영어란 단순히 수단이 아니라 배움 그 자체를 즐기는 일인 것 같다.     


두 분에 비하면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주 다니는 편이기도 하지만 영어는 어디까지나 생존 영어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늘 벙어리, 귀머거리 신세이다 보니 오로지 번역기만을 믿고 비행기를 탄다. 그러면서도 영어를 배울 생각을 하지는 않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내가 만약 영어를 좀 더 유창하게 했더라면 외국에서 만나는 이들과 스몰토크를 하며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여행의 경험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하는 어이없는 일들을 겪으며 당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가끔은 ‘영어를 좀 배워볼까’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렇게 영어를 배워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주로, 이른바 ‘혼여’를 부러워하는 순간이다. 여러 곳을 다니는 여행을 하고 있지만, 막상 해외를 혼자 여행해본 일은 없다. 패키지 투어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세계 곳곳을 다녀봤지만 매번 가족 중 누구거나, 친구와 함께였다. 그러니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혼자 외국을 여행하는 일은 늘 넘지 못한 도전이며, 변치 않는 로망으로 남아있다.     


며칠 전의 일이다. 우연히 항공사 마일리지를 검색하다가 11월에 호주 시드니 항공권의 좌석에 여유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시드니라면 캥거루와 코알라,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나 마찬가지다. 좀 더 생각해보니 몇 가지가 더 떠오르긴 했다.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라는 곳, 비행시간은 열 시간이 넘지만 시차는 의외로 적어 두 시간이라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간 다닌 나라들은 덥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북반구의 나라들이었는데 호주라면 적도 아래 남반구의 나라. 

갑자기 내가 알지 못하는 시드니의 많은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드니를 왕복할 수 있는 마일리지 좌석은 2석이 남아있었다. 11월이라면 연휴가 있지도 않고, 여름휴가 시즌도 지난 이후이다. 즉, 남편도 딸도 휴가를 내기 쉽지 않은 시기이니 나 혼자 첫 해외여행에 도전할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드니로 데려다줄 항공권을 예약하기까지 망설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영어’였다.     


나의 영어라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졸업하는 세월을 보낸 것이 무색하게도 생존 영어 수준이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손짓과 단어 뒤에 please~를 붙여서 해결봐야한다. 다행히 그간 다닌 여러 나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구글로 길을 찾아가며 잘 다니고 무사히 돌아오긴 했다. 하지만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을 때의 그 답답함과 막막함은 매번 나를 움츠러들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파파고나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이런 편리한 앱들은 계속 영어 공부를 더 미루는 핑계가 되었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결국 마일리지 항공권을 구입했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할듯해서였다. 내친김에 좌석 지정까지 미리 마치는 동안 아직 먼 11월은 갑자기 며칠 후쯤인 듯 다가와 어느새 비행기에 앉아 호주의 시드니를 향해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막상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이메일로 날아온 e티켓을 보고서야 나의 ‘혼여’가 아주 조금 실감 나기 시작했다.     

혼자 시드니까지 갈 수 있을까. 혼자 보내는 시드니에서의 열흘은 어떤 풍경일까. 이제 겨우 봄인데, 가을의 시드니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도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이렇게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마음먹은 혼자만의 여행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비록 파파고만 믿고 있는 생존 영어자 이긴 하지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나를 지켜줄 마법의 단어 please!, 바로 그 주문을.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 첫 출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