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공기 냄새
2024.8.23.
by
친절한 James
Aug 23. 2024
좀 걷기로 했다.
L의 집 뒤편에 야트막한 동산들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길이 있었다.
L은 앞장서고 K와 친구들이 뒤따랐다.
L은 K, 그리고 함께 놀러 온 친구들과 함께
길 입구에 들어섰다. 나무 대부분은 앙상했고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푸르렀다.
며칠 전 내린 첫눈의 흔적이
실눈을 뜨며 그들을 맞이했다.
굽이치는 오르막을 지나
반듯한 계단 앞에 다다랐다.
현충탑 공원으로 오르는 길,
L은 매일 아침 이 길을 오르내렸다.
계단이 300여 개쯤 되는 것 같았다.
L은 단풍처럼 빨간 패딩을 입었고
K가 직접 만들어 준 파란 목도리를 둘렀다.
K는 맥문동 향기를 담은 듯
연보랏빛 외투를 입었다.
12월의 냉기가 사람들의 기관지에 파고들었다.
콕콕 쑤시는 건조함은
바늘처럼 콧속을 찔러댔다.
입에서는 고요한 탄식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입김은 L의 마음을 닮았다.
두근거림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푹신푹신 솟아올랐다.
매일 걷던 길인데 오늘은 좀 다르네.
오르막이 힘들지 않고
내리막이 외롭지 않아.
산뜻한 하늘은 파랗게 맑았고
나뭇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L은 추위를 많이 탔는데
오늘은 괜찮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 겨울 산책길이었다.
정상에서 두텁게 살랑이던 공기는
중턱으로 내려오자 가늘게 팔랑거렸다.
낙엽 향기가 배어있는 듯
은은한 알싸함 속
은근한 포근함이 느껴지네.
잎은 다 떨어졌지만 L의 마음에는
알록달록한 풍경이 가득했다.
K와 통화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키워 온 감정이
길을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렸다.
부드러운 눈길을 걸으면 몸의 무게만큼
단단해진 발자국이 뒤에 남는다.
K와 L이 서로를 마주 보며
잠깐씩 바라보는 느낌도 그랬다.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 같았다.
L은 몇 년 전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로마에 사흘 머물렀는데
하루는 '아피아 가도'로 불리는
아피우스의 도로, 비아 아피아를 걸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고속도로였던 곳,
단단한 돌이 촘촘히 모여
곧은길을 만들었던 로마의 대동맥.
L은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꼈다.
아피아 가도의 가로수를 바라볼 때처럼
산책길 나무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그대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이,
앞으로 오랫동안 동행할 시작이 되길
L은 마음속에 새겨보았다.
상큼한 겨울의 공기 냄새가 가득했다.
겨울의 공기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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