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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Dec 17. 2023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2023.12.17.


"아, 향긋해."

K는 두 손으로 감싼 머그잔에 

얼굴을 가까이하며 웃음 지었다. 

특별한 장식 없는 순백색 도자기 잔 위로

자그마한 김이 서툰 꽃꽂이처럼 피어올랐다. 

체크무늬 무릎 담요를 다리에 두른 K는 

마당 테이블 의자에 앉아 차 한 모금 마시고 

가벼운 탄식 한 모금 내뱉었다. 

곁에는 같은 담요를 어깨에 걸친 L이

같은 모양 다른 색의 찻잔을 홀짝이며 앉아 있었다. 


꽃나무가 드리운 마당 한쪽에는 

작은 웅덩이와 아기자기한 풀숲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이 직접 지은 2층집과 나란히 이어진 작은 우주, 

사계의 풍경을 포근히 담아낸 이곳에서

두 사람은 서른일곱 번의 가을을 함께 맞이했다. 

연애할 때부터 그려 온 집이었고 꿈꿔 온 공간이었다. 

주택이 완공되던 날도 바로 이 자리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 


"당신 참 멋진 사람이었어요."

K는 그들의 첫 만남에서 

L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매 순간 그랬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사랑 정말 다정하고 감사했어요."

"나도 그래요. 내 사랑 덕분에 나도 

진짜 사랑을 알고 나눌 수 있었어요."

L도 K가 좋아하는 눈빛을 담아 말을 건넸다. 

"사실 내 사랑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의 나로 살지 못했을 거예요."

L은 말을 이었다. 

"과거의 나는, 아니 이제 난 여기에 있으니

이전의 나를 '그'라고 불러야겠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L은 진하게 우려낸 허브차보다 

더 그윽한 회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맞춰볼까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하면...

그래, 여린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표현할 줄도 몰랐던 사람이었죠."

"딱 맞는 말이네요. 우리가 지금껏 

다툼 한 번 없이 살았는데

사실 싸움이 되지 않았죠. 

나는 침묵 속으로 빠져 버렸고

진심을 제대로 전할 줄 몰랐는데 

당신이 참 많이 기다려 주었어요. 

아이처럼 하나씩 배우고 익혀나갔죠. 

덕분에 내가 조금씩 바뀌고

우리 사이는 더 좋아졌어요."

"이렇게 무르익은 풍경처럼, 

그리고 우리 인생처럼 말이죠.'


풍성한 가을 햇살이 대지의 어깨너머로

자욱이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의 황혼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요."

"나도 그래요. 정말 감사하고 사랑해요."

은은하게 울먹이던 L의 가슴속에

잔잔한 음률이 울려 퍼졌다. 

올라프손의 <예술과 시간>.

생의 마지막 날 K와 손을 마주 잡고 

행복한 표정으로 듣고 싶던 음악이

지금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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