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가득한 중고서점을 추억하며
20대 후반, 지하철 2호선을 타면 갈 수 있는 신촌과 홍대를 한동안 선망했었다. 경기도 살며 비수도권대학을 나온 나는, 인서울 하지 못한 열등감과 동경이 뒤섞여 그 곳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쉬는 날 아무 계획 없이 전철역까지 걸어간다. 1호선을 타고 가다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다. 한강을 건너가면 금방 홍대입구다. 처음 신촌과 홍대나들이를 했을 때는 그게 뭐라고 긴장도 하고 위축도 되었지만 넘치는 사람들 속에 느껴지는 에너지가 좋아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종종 찾곤 했었다.
홍대입구에서 신촌 까지 걷다보면 화려한 간판들 사이로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중고서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그 곳엔 골목마다 나름의 세월을 만들어가고 있는 헌책방들을 꽤 있었고, 걸어가다 눈에 띄는 헌책방에 무작정 들어가 책 구경하는 것이 주말 서울 나들이였다. 발 편한 운동화를 신고 양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차례로 헌책방 순례를 다니는 날은 인디애나 존스나 라라 크로포드 보다 더 두근거리는 모험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화가의 전시도록을 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이미 폐간된 잡지의 과월호를 사기도 했다. 내용보다 책의 외양과 제목에 끌려 좌판에서 귀걸이 고르듯, 별 이유 없이 집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켜켜이 쌓인 퇴적층 속에 묻힌 화석 같은 책을 발견하면 먼지 속에서 낡은 책 특유의 냄새를 만날 수 있다. 저자 사인에서부터 소유했던 사람의 책 도장, 책을 구입한 날 적어놓은 메모와 빼곡히 물결치며 표시해둔 문장들까지 거쳐 간 사람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몸에 새겨놓은 책들만이 이런 냄새를 풍길 수 있다.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같은 대형서점에서 나는 깨끗하고 정돈된 냄새와 완전히 다른 결의 냄새고, 패션몰 가운데 있는 반디 앤 루니스에서 나는 화려한 향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냄새다.
빛도 잘 안 드는 구석진 서고에 되는대로 얹혀있는 책 더미를 지나 무심히 꽂힌 책장 속에서 숨겨진 보물들을 찾기라도 할 듯 다니면 시간은 구름처럼 서가를 흘러갔다. 한가한 중고 책방에서도 시간은 흘러 오후 햇살이 길어지면 춤추는 요정처럼 날리던 먼지들도 슬며시 내려 앉아 낡은 책 냄새를 더 또렷하게 만들곤 했다.
그때 그 서점들은 언젠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가고 싶은 소중한 공간이었다. 화려한 서점에 깨끗하게 진열된 새 책과 달리 낡은 서가에 희뿌옇게 꽂혀있지만 겉이 아닌 속의 담긴 진정한 책의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처럼, 스펙이 아닌 내 내면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홍대에서 이대 앞, 신촌 까지 탐방하듯 노니며 다니게 했던 서점들은 이제는 하나둘 씩 사라지고 공씨책방, 숨책 정도만이 남아있다. 예전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세워지거나 카페가 들어섰다. 책을 좋아하던 이들이 찾던 편한 장소는 낡은 간판의 중고서점대신 깔끔한 인테리어와 감성으로 단장한 알라딘과 예스24 중고서점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취향을 찾던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독립서점을 찾아가고 있다.
더 편하고 더 매력적인 서점들 많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낡은 중고서점을 가끔 찾아가는 이유는 순전히 책 냄새 때문이다. 그 책 냄새를 맡으면 열등감과 자괴감, 시기와 질투, 선망과 동경 사이 어디쯤에서 헤매던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여전히 남아있는 내 부족한 모습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활자들 사이를 거닐며 안락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재단장 하기도 한다.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길 기다리는 책들 사이에서, 낡은 책방 냄새가 내 영혼에 스며들 때, 역설적으로 새 것이 되는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