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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Aug 18. 2022

번아웃

워킹맘, 퇴사의 세계

몇 년 전 동갑내기 워킹맘과 함께 한 지점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분 역시 두 아이의 엄마인지라 함께 전장에 나온 전우가 힘든 일, 궂은일을 나누듯이 맘에 들지 않는 상사 욕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남편 욕도 함께 하며 허울 없이 지냈다. 하루는 그 동갑내기 워킹맘이 출근하자마자 신세한탄을 했다. 두 딸이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며 투정을 부린다는 거다.


“ 나도 출근하기 싫은데 아침마다 애들이 학교 가기 싫다고 해서 한소리 하고 왔어요. 엄마도 은행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냐고 엄마도 출근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참고 출근하는 거라고 했죠. 힘든 건 알지만 참고 가라고요. 휴..”


“ 아이고, 아침부터 고생했네요. 커피 한 잔 해요. 그래도 애들한테 그렇게까지는 이야기하지 말지 그랬어요. 출근하는 게 지긋지긋해도 엄마는 매일매일 회사 가서 일어날 새로운 일이 기대되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일한다고, 너희들도 학교생활 즐길 수 있다 해주지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니 동료 입장에서 얼마나 재수 없는 대답이었던가? 당시의 나는 한창 일이 재밌고 즐거웠다. 아들 둘 키우는 것보다는 은행에 출근해서 일하는 게 훨씬 낫다 아니 보람 있다! 집에서 세수도 안 하고 퍼질러 있다 동네 엄마와 수다 떠는 인생보다 훨씬 자아실현이 가능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속으로 되뇌었으면 되었을 걸 힘들어하는 사람의 입장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런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아 버렸던 거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은행 생활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동료에게 그런 건방지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할 만큼 일하는 것이 재밌고 성과를 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즐겁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번아웃을 피해 가지 못했다.   


“ 아니 전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다 해줬는데 고 팀장은 왜 맨날 안된다고 하는 거야?”

“ 우리 아들이 회사에 있어서 바빠서 올 수가 없단 말이야. 다 아는데 좀 해줘.”     


20년 은행 생활하다 보면 이런 민원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사소한 민원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웬만해서 민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늘 지점 민원 담당자였기 때문에 창구 마찰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몹시. 은행 직원에게조차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좋은 고객이 대부분이지만 아주 가끔 출현하는 이런 고객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익살스러운 말솜씨와 제스처로 마음에 참 와닿는 멘트를 날리는 인기 강사 김창옥 님은 저서 <지금까지 산 것처럼 앞으로도 살 건가요?>에서 번 아웃 증후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고로쇠나무처럼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물은 간직하고 내어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을 남긴 채 일을 해야 하는데 자기 물을 다 빼줘서 물 없는 나무. 샘물은 위에서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차오르는 것이다. 샘물이 말랐다고 생각될 때는 뭔가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내 안의 수원에 문제가 없으면 조금씩 물이 차오른다고.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마치 겨울에 모든 생명이 잠시 쉬어가듯 말이다. 겨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기가 아니라 땅의 기운이 차오르길 기다리는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내 안의 기운이 차오르길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번아웃. 아침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이상 타이레놀 한 두 알로는 해결되지도 않았다.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묵직한 머리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두통은 나날이 더해갔다. 내 몸속 안 수분이 죄다 빠져버렸나 보다. 조금의 물도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밑에서 차오를 수 없는 말라 가는 나무인 것 같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조금이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이 차오를 텐데 하루하루 숨이 차기만 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한창 바쁜 시기에는 직장인이라면 매년 해야 하는 건강검진조차 번거롭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몇 년 전까지 남편도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본인 검진, 배우자 검진 프로그램이 있어 일 년에 2번씩 검진 일정을 잡아야 해서 귀찮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건강검진을 할 때 휴가 사용이 의무화되었지만 예전에는 바쁜 평일에는 휴가 내기 눈치 보느라, 황금 같은 토요일에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기에 미루고 미루는 일정이 건강검진이었다.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서서히 고장 나게 마련이다. 건강검진할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고장 난 몸이 걱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내 몸뚱이 하나 챙길 시간이 빠듯했다. 검진은 대개 미루고 미루다 연말이 넘어가기 직전 겨우겨우 받곤 했다. 검진을 받으면서도 다시 회사로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아이들 학원 시간을 챙겨본다. 무언가를 하면서도 늘 이후 일정을 체크하고 분 단위 시간 계산을 하는 나. 시간만큼 소중한 자산은 없다고 생각했다.

     

“ 이건 추가로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 네? ”


머릿속에서 이후 일정을 구상 중이던 나에게 의사 선생님께서 정신 차리라는 듯 말씀하셨다.

순간 언젠가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나 비행기가 너무 무섭다고. 이 고체 덩어리를 어떻게 믿어. 난 절대 비행기를 탈 수 없어.”

“ 이봐. 비행기가 사고가 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와인 한잔 마시고 푹 자면 일어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라고.”

“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라고. 나는 아이들도 있고 가족이 있고 연로하신 부모님도 계시고,, 지켜야 할 게 많은데. 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 어떡하라고, 우리 집 개는 어떡하고.”      


코믹 드라마였다. 그저 아무 일 일어날 일 없는 비행기 탑승에 온갖 상상과 걱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은 여주인공의 대사. 언젠가 경험한 비행기 터뷸런스로 비행기만 타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는 나로서는 그 장면이 우습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으니 말이다. 특히 어리기만 한 아이들.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지금 당장 흔들릴지도 모르는 비행기에 탑승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 선생님, 제가 지켜야 할 게 좀 많은데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무섭잖아요.  '    






“ 있잖아, 내가 너무 지쳐서 좀 쉬려고. 부모님께는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를 못하겠는데 오빠가 대신 이야기 좀 해줄래?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실 텐데, 걱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내가 좀 힘들 것 같아. 요즘 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서 부모님한테 긴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정신 좀 차리고 따로 찾아뵐게. ”


“그래 잘 결정했어. 부모님께는 오빠가 잘 말씀드릴게.”     


친정 부모님께 직접 퇴사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결국 친정 오빠 힘을 빌렸다. 30대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관둘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 힘들어요 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다들 무슨 소리냐며 그 좋은 직장을 왜 관둔단 말이냐 말렸지만 유일하게 “그래 네가 힘들면 그냥 쉬어.”라고 말해주었던 친정 오빠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 힘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이 아닌 그저 마음을 알아주는 공감의 한마디가 필요했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조건을 따져보고 질문이 많은 남편과 달리 이번에도 친정 오빠는 단 몇 마디로 나를 위로했다.


내내 머릿속으로만 계획하고 계획했던 나만의 프로젝트 <퇴사>에 엔터를 쳤다. 21년 만의 퇴사다. 누가 뭐라든 내 인생이고 지금 챙겨야 할 중요한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인생의 주인공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좋은 포지션에서 관둔다고? 워낙 많은 사람이 근무하는 조직이고 여러 지점과 부서를 거치며 순환근무를 하는 조직의 특성상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퇴사가 좋은 소식도 아니기에 미리 인사를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공문이 뜨자마자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언젠가 생일 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자전거는 어린 시절 내 분신과 같았다. 운동신경이 참 둔한 아이였는데 어떻게 자전거는 처음부터 어렵지 않게 잘 탔는지 어디를 가나 자전거와 함께였다. 매일 가던 동네 서예학원, 집 앞 슈퍼, 바로 옆 친구 집에 갈 때도 늘 오렌지 빛깔의 자전거를 자랑스럽게 타고 다녔다. 페달을 여러 번 굴려 가속이 붙으면 더 이상 발을 굴리지 않아도 가볍게 슝 하고 달려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 아,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야는데!! 그래도 우회전해야 해! '

' 악!'

내 몸은 이미 자전거에서 튕겨 나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목과 어깨가 몹시 쓰라렸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미리 속도를 줄였어야 했는데..


은행을 다니는 동안 종종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기 직전의 느낌이 들었다. 가속이 붙어버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넘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어릴 때처럼 나뒹굴지 않으려면 미리 속도를 줄여야는데 멈출 수 없는 느낌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다. 방향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미리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해 보자. 그렇게 퇴사를 완전히 결심한 날, 나의 VVIP에게 보고했다.      


“엄마, 회사 관두기로 했어. 이제 너희들이랑 매일매일 같이 있어줄 수 있어. 어때? ”

아이들이 한껏 들떠 기뻐할 얼굴을 기대하며 이야기했다.      


" 네? 정말요? 거짓말이죠? 회사 관둔다는 말 거짓말이죠? 그냥 며칠 휴가 쓰는 거 아니에요? 며칠 쉬다 다시 출근한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회사를 다니지 않는 엄마를 생각해본 적 없는지 두 아이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어본다.     


" 아니야, 정말이야. 너희들이랑 매일매일 같이 있는 엄마가 될 거야."


(이미지 출처. 이미지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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