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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May 17. 2020

가르친 걸까

배운 걸까


내 나이 스물 하고도 아홉 살 반, 철이 들어도 한참 들었어야 할 시기인 그때에 아이를 낳았다. 스물아홉 살 반이라고 굳이 쓰는 이유는, 여자 나이 삼십 전에 아이를 낳아야 머리가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통계를 어디선가 들은 이후이다. 혹시나 후에 아이가 공부 못하는 탓을 어미에게 돌릴까 보아 미리 방패를 친 것이다. 한국 나이로는 삼십이 넘었을 때 애 엄마가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답답한 청맹과니였다. 안 생기는 아이를 걱정했지 엄마가 될 준비는 안 하고 있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못 낳는다고 뒤에서 수군거린 시집식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아이를 떡 하니 내놓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온전한 생식 기능을 증명할 생명의 탄생이 기뻤다고나 할까.

시댁이나 친정에 첫 손자로 기쁨을 준, 최초로 나에게 '엄마'라고 불러준 아이. 그 아이에게 잼 잼을 가르치고 도리 도리를 가르치고 걸음마할 때 앞에서 손뼉을 쳐주고, 이런 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까마는. 정작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에비~" 하면서 얼마간의 해선 안 되는 것들과, 억지로 한글을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은 훨씬 많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불편함을 전혀 몰랐던 철부지 어른인 내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선생이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단잠을 희생하며 억지로 일어나 어르고 먹여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나는 시험 때도 밤새운 적은 없으니 말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사랑'이라는 실체가 이처럼 눈앞에 엄연함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까진 실패한 '사랑'에 실망한 나머지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평생 남에게 고개 숙이는 일없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터이다. 우리 아이에게 유아원에서 자주 깨물리던 아이의 엄마에게 늘 사죄하여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웃으며 기억할 수 있다. "저 집 아들은 악어 xx" (아빠가 악어) 라던 어떤 엄마의 푸념.

아이가 아니었다면 '자식 둔 죄인'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젠 우리 어머니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늙음과 순환의 고리에 대해 숙명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정말 형편없이 이기적인 사람,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이라던 나의 욕심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내가, 과연 엄마의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아픈 엄마가 회사일을 못하게 되자,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아빠의 회사 일을 돕느라 출근을 하고 있다. 관심 밖이던 3D 업종에 이제는 적응한 듯 보인다. 안전모에 작업화를 신고 현장을 지키는 모습이 건설회사 일꾼이 다 된 듯 어울려 안심이 된다.

내 얼굴을 대할 때마다 끊임없는 건강에 관한 잔소리로 훈계를 하는 아들아이는 나를 계속 가르칠 것이다. 이 아이에게 아직 배울 것이 많은가 보다. 나를 끝까지 죽여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주신 파트너인 듯 하니 말이다.


문학세계 수록글

05162020 일부 수정


사진은 김재영 목사님 사진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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