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퇴사를 감행하다
퇴사 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실제 퇴사는 아닌 '조용한 퇴사'. 요즘 전세계 MZ세대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근무 형태다. 실제로 사표를 던진건 아니지만 굳이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고 조용히 맡은 일만 최소한으로 하는 직장생활을 말한다. 미국의 한 청년이 이러한 조용한 퇴사의 개념을 틱톡에 올린 뒤 널리 퍼지게 되었다.
누군가는 열정도 패기도 없이 그게 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불합리와 부조리가 판치는 직장생활에서 '조용한 퇴사'는 생존에 필수적인 스킬이라는 것. 나 역시 '조용한 퇴사'인줄 모르게 조용한 퇴사를 감행하며 마음의 평온을 얻은 경험이 있다.
본인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업무에 배치하고, 그마저도 열심히 수행했더니 근무평가에서 이유없이 최하점을 준 무개념 갑질 상사. 그런 인간같지도 않은 것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말고 좀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매일 고민하던 시기였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고 싶은 충동이 순간순간 일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내 방법을 찾았다. 열심히 일하고도 최하점을 받았다면, 앞으로 내가 받은 평가만큼 근무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발상을 바꾸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던지.
저런 막장 상사들에게 주기 아까운 책임감을 지닌 나는 일단 어찌됐든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업무는 충실히 수행하되 그외 시간은 나만의 것으로 쓰기로 했다. 일단 회사 도서관에서 여러가지 책을 빌려다가 재미나게 읽었다. 관리자란 인간이 옆에 지나가던 말던 나는 근무중 독서를 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업무엔 뒷전이고 딴짓만 한들 악감정으로 최하점을 준 그가 할말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봐야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독서하거나 웹써치를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진짜 최하등급 만큼의 업무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뿐. 덕분에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늘 후순위로 밀려있던 독서를 살뜰히 챙길 수 있었다.
이렇게 조용한 퇴사가 유행하게 된 원인에 나쁜 상사가 있다는 사실이 아프다. 조용한 퇴사는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관리자 밑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하직원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조용한 퇴사를 감행함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막고 시간낭비를 줄이며 그 힘으로 겨우 버티는 것이다. 직장내 불합리와 괴롭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조직 전체의 효율을 갉아먹고 인력을 낭비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며 업무로 인정받기 위해 열정을 바치고 조직에 충성하는 것이 실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만두고 피하는 것 또한 현명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돈을 버는 행위는 자아실현 이상의 생존의 의미가 있으니.
퇴사하는 것도 참고 견디는 것도 답이 아닌 상황에서 '조용한 퇴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겐 일도 중요하지만 일보다 중요한 가족, 친구, 취미가 있다는 것을 MZ세대들은 잘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었던 젊은 직원들이 에너지를 쏟아가며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직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치열한 정글에서 소모품처럼 살아가는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