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단풍구경이 처음이었다니!
[훌쩍 : 거침없이 가볍게 길을 떠나는 모양.]
훌쩍이란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도, 자주 해본 적도 없는 모양새다. 워낙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살짝 불안도가 높아지는 성향이라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은 다른 일보다 몇 배는 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목요일쯤이었나- 우연히 광고에 속초-인제 여행 패키지가 아주 작게 떠있는 걸 보고 무슨 마음이었는지 클릭! 한 순간 패키지에 기재된 인제자작나무숲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음 주부터 추워진다 하니 이번주가 제격이라며~ 갑자기 굳은 결심을 하고, 금요일저녁 남편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결혼 후에는 주로 아이들에게 맞춘 여행이었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노는 재미있는 여행(물놀이, 액티비티등)이었고, 우리에겐 극기훈련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의 여행지 풍경, 향기 등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이 성장해서 다양한 여행이 가능해졌지만 학원이 문제였다. 빼먹고 가자고 아무리 꼬셔도 한번 빠지면 보강해야 해서 가기 싫다는 사춘기 주니를 두고 갈 수도 없으니- 캠핑도 여행도 슬슬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동의는 이후 문제, 요즘 우리 집 최고의 빌런사춘기 주니에게 결재받는 게 급선무였다. 슬쩍 건넸는데 자기도 여행 가고 싶다고 했다. 학원 빠지고 가도 되겠다며...(숙제 안 한 거 엄마 알고 말한 거야.) 며칠 기분이 좋더니만 한 번에 이렇게 좋다고 해주니 진짜 너무너무 고마웠다.( 별게 다 고마울 일일다.) 모든 일이 순항일 순 없지 이번엔 딸이 교회체육대회라고 주일에 교회를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럼 학교 마치고 금요일저녁-토요일 떠나기로 탕탕탕! 결정을 했다. 모든 결정이 밤 9시 이후에 진행 됐다. 남편은 폭풍 코스를 짜고, 나는 숙소예약을 새벽에 완료하고 하교 후 속초-인제 여행을 “훌쩍”떠났다.
이번 여행은 “온전히 가을만끽 여행"이었다. 최종목적지는 인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었으나, 여행지에서 먹는 기쁨은 여행의 이유이기에 속초시장에 들러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다음날 인제로 이동하기로 했다. 대포항의 가을밤은 고요했다. 불빛들은 우리 가족들을 반겨주듯 예쁘고, 맛있어 살이 오통통하게 찌는 밤이었다.
다음날, 속초에는 약간의 비가 내렸다. 인제를 떠나기 전에 영금정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사춘기와 여행을 할 때 하루에 여러 코스를 잡아선 안된다. 많아야 두 개, 한 개가 아마도 적정선이다.)
영금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부부가 연애할 때 첫 여행을 했던 곳이었다. 아~이렇게 나름 역사적인 곳에 15년 만에 오다니, 그것도 둘에서 넷이 되어서! 낭만적으로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걸어볼 작정이었으나, 너무 거친 바람으로 걷기조차 힘들어 잠깐 내려 영금정만 다녀온 게 전부였다.
15년 전 우리는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수줍어했고, 설렜으며, 지금도 그때의 분위기가 느껴질 뻔했는데, 현실의 속초 칼바람에 머리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다음번에는, 남편과 둘이서만 오붓하게 와봐야지 마음먹었다.
최종 목적지인 인제에 위치한 원대리자작나무숲은 사계절이 다 아름다운데 특히 겨울에 눈이 오면 더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제로 넘어오면서 비가 내리더니 숲 근처에선 비가 그쳐 날도 너무 좋았다.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야 하는데 사춘기 주니에게 사실을 사전고지를 하지 않았다. 정 싫으면 아래서 기다리라고 할 참이었는데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사춘기 주니도 함께 올랐다.
숲 길은 단풍으로 울긋불긋 물들어 완연한 가을이었다. 숲을 걸으면서 자작나무가 어디에 있긴 한 걸까? 생각이 들 때쯤 동화 속 마법의 문이 열리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듯 순간 자작나무숲이 속삭이며 반겨주었다. 쭉쭉 뻗은 자작나무의 모습, 바람소리, 나무가 서로 흔들리며 들리는 소리까지 자연의 신비한 소리가 온통 가득했다. 올라가다 보니 쭉쭉 뻗은 자작나무의 모습이 아닌 위에 휘어진 자작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신기하네를 연발했지만, 단순한 신기함이 아니었다. 지난겨울에 폭설과 기후 이상으로 인해 눈의 무게에 고드름의 무게도 너무 무거웠던 탓에 나무들이 휘어져 버린 것이다. 얼마나 안타깝던지 -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자작나무를 심은 것도 사람, 아프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작나무숲에 앉아서 분위기에, 자작나무에 흠뻑 취했다. 남편은 결혼하고 제대로 된 가을여행은 처음인 거 같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여행을 했지만 어쩌면 이제 나이가 들어 여행 중에 가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어머님과 함께한 13년 동안 마음 편이 여행한 적이 별로 없었다. 여행을 갔지만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하는 압박감이 우릴 짓눌렀고, 아프시면서는 가족 여행자체가 어려웠다. 도와줄 이도 하나 없었던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까지 - 회상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자작나무 잎사귀들처럼 하나 둘 떨어져 내린다.
힘겨웠던 시간의 여행은 지금 서 있는 곳도, 계절도, 냄새도 모두 희미할 뿐이었는데, 이제 제대로 여행이라 느껴지는 걸 보니 자작나무숲도, 속초도 쉽게 잊힐 것 같지 않다.
남편는 이제 이런 여행을 자주 떠나자고-그저 오늘은 가을이라서, 아니 가을이 아니라서 떠나는 “훌쩍 여행"을이제 시작해 보자며-우리는 또 설레었다.
"인생과 여행은 신비롭다. 설령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는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김영하_여행의 이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