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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17. 2021

누구에겐 삶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까

이 아침, 서울의 공기는 짙은 구름 속에 잠겨있습니다. 곧 부슬부슬 비라도 내릴 듯합니다. 휴대폰 속 날씨를 들여다봅니다. 구름 그림만 있지 구름 밑에 비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래도 기상청 전매특허인 '곳에 따라 비'가 감초처럼 들어있을 테니 출근길을 서두르게 합니다.


아침 6시 반 망우역에 도착하는 경의 중앙선을 탑니다. 항상 이 시간에 타기에 플랫폼에 서있는 사람들의 몇몇은 낯이 익을 정도입니다. "아 저분 오늘은 백팩을 메고 나오셨네?" "매일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시는 것 같던데 오늘은 화사한 원피스를 입으셨구나. 좋은 일을 앞두고 있거나 중요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으신가 보군" 뭐 인사는 안 할지라도 대충 눈치를 챕니다.


이렇게 몇몇 사람들의 얼굴과 행색이 눈에 띄는 이유는 기다렸다 타는 전철 칸이 대부분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학기 초가 되어 개강을 하여 강의실에 들어가면 첫날 앉았던 자리에 학기 끝날 때까지 앉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 앉으라고 지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무언의 약속처럼 한 학기 내내 지정석이 되어버립니다. 전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타고 내리는 칸의 출입문 번호가 대부분 정해져 있습니다. 그 칸의 출입문으로 타야 환승하거나 내릴 때 바로 플랫폼의 출입구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걷는 시간과 거리를 가장 짧게 할 수 있는 위치를 본능적으로 찾아내 매번 그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이 낯이 익을 뿐만 아니라 어느 역에서 내리는 지도 대충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매일 같은 전철 칸에 타는 사람과는 좌석 쟁탈 경쟁을 피하게 됩니다. 같은 출입문으로 타지만 각자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져 혹시 빈 좌석이 나더라도 먼저 앉으려고 눈치 보지 않기 위해섭니다.


매일 같은 전철 칸에 타게 되면 웬만하면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어느 역에서 내릴 것인지 눈치챕니다. 출근시간에 그 칸에 탄 이유가 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역에서 내릴 것인지 아니면 환승역까지 계속 갈 사람인지 딱 보입니다. 대부분 매일 같은 전철 칸을 탔기에 가능한 예측입니다.


오늘도 이런 평상시의 습관으로 인해 눈치를 채고 다음 역에서 내릴 사람 앞에 서있다가 한 정거장 지나자마자 좌석에 앉았습니다. 뭐 갈아타는 환승역인 왕십리까지는 10분여밖에 안 가기에 앉으나 서나 그게 그거긴 합니다만 그래도 서서 가는 것보다 앉아가면 이것저것 휴대폰 보기도 편하고 해서 앉아가려고 하는 심리가 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렇게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을 하고 시내로 들어옵니다. 2호선에서도 제가 타는 칸은 앞에서 두 번째 칸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칸에 타야 내리면 바로 계단과 연결되어 지상으로 나오는 최단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철 칸은 여기저기 빈 좌석이 보일 정도로 여유롭습니다. 제가 앉은 좌석의 앞쪽에도 7석의 좌석에 2명만이 앉아 있습니다. 여유롭다 보니 앞 좌석에 앉은 사람의 면면이 눈이 들어옵니다. 왼편 끝 좌석에는 여성분이 앉으셨고 오른쪽 중간에는 남자분이 앉으셨습니다. 여성분은 계속 휴대폰을 쳐다보고 계셨는데 남자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계십니다.

남자분은 외견상 60세를 넘기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흰 머리카락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숱이 꽉 차 있습니다. 긴 팔 셔츠에 면바지를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지런히 앞으로 모아 잡고 있는 손에 온통 페인트 칠이 남아 있습니다. 내려다보니 신발도 온통 페인트가 묻어 있습니다. 옷에는 페인트가 전혀 묻어있지 않을걸 보니 갈아입으신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발아래 검은색 백팩이 있고 빨간색 코스트코 쇼핑백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일하시는 장비와 도구들이 담겨 있는 듯 보입니다.


밤샘 작업을 한 듯합니다. 마스크로 반쯤 가려진 얼굴이라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감고 있는 눈 위로 피로가 한껏 실려있는 듯 보입니다. 밤새 일을 무사히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귀가를 하는 것일 테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 아침 저 피곤한 모습으로 일터를 나간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감고 잠시 청한 잠이 꿀잠이 되고 내리는 정거장 지나치지 않길 바라봅니다.


누구에겐 밤을 지새워 일을 해야 할 만큼 삶이 무거울까요? 처절히 눈물 나도록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시지프스처럼 돌을 등에 지고 산비탈을 오르는 것이 '산다는 것'일까요? 이 아침 산다는 것의 질문이 전철 칸 앞좌석에 앉아 잠을 청하고 계신 분의 모습을 통해 확 덮쳐 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버티고 견뎌내는 것이 삶일 테지만 힘들게만 노정되어 있다면 금방 지쳐버리고 말 겁니다. 의욕이 사라지고 비관의 싹이 틀 겁니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긍정의 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졸린 눈을 비비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마땅한 이유가 생각이 안나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라도 핑계를 대어 봅시다. "내가 조금 고생하면 가족들이 편안해질 거야"라고 최면을 걸어 봅시다. 내가 이 첫새벽에 출근하는 이유에 합리성을 가져다 붙여 봅시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아침 처진 어깨를 바로 세우고 졸린 눈을 다시 크게 뜰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모두가 긍정의 힘을 내고 두 주먹 불끈 쥘 수 있는 용기, 그래서 주어진 일을 오늘도 완벽히 수행해 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해 봅니다. 오늘 저녁 퇴근시간에는 허허 허탈한 웃음으로 퇴근하는 것이 아니고 하하하 가슴에서 우러나는 웃음으로 사무실을 나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꼭 그렇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양손에 지워지지 않은 페인트를 묻히고 눈 감고 가시던 분도 오늘은 편안한 날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살아내고 살아지는 거니까 말입니다. 나에게만 삶이 무거운 짐이 아님을 눈치채는 것만으로도 은근한 동질감이 작동할 테니 말입니다. 어깨를 펴고 일과 마주해 봅시다. 못해낼 일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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