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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Sep 28. 2023

마티즈와 슈킨

맹목적인 믿음 

1.

이주 후에 변한 것이 있다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이 믿음은 거의 맹목적인 수준까지 닿았는데 한번 의심을 시작하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로 우울의 나락으로 ‘뚝’하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울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는 것은 아주 얇은 굽의 스틸레토 힐을 신고 암벽 등반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더디다. 


믿을 수 있는 지인들과 가족들이 있었던 모국에서는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한 내 선택의 의심되면 그들과 상의하곤 했다. 그들은 해당 사건에 대해 나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조언은 내가 하는 의심을 상쇄시켰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남편과 나, 이렇게 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시행한다. 낯선 환경과 문화 때문에 모국에서 보다 더 면밀히 조사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수십 번은 더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가능하다 싶을 때 결정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후에는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찾아온다.  


‘이렇게 하길 잘한 건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면 이내 이는 공포로 변한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생기는 일들을 상상하고 공포에 떤다. 공포는 몸과 마음을 마비시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해 스스로를 고통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결국, 이 감옥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하는 후회뿐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나 스스로를 인생의 패배자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게다가 모국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도 없다. 여행자가 아닌 이주자인 우리는 잠시 여기 있다가 다시 모국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의심이 공포가 되고 공포가 곧 후회로 바뀌어 좌절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의심을 하지 않는 습관을 키웠다. 없던 자신감도 끝까지 끌어올려서, 심지어 스스로에게 허풍(bluffing)까지 치면서 ‘나는 무조건 잘할 거야.’라고 대뇌 인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맹목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가 앙리 마티스와 러시아 출신의 후원자 세르게이 슈킨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마티즈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는 <Dance II>(1910)을 감상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슈킨의 후원 덕분이다. 




슈킨은 평소 본인이 신뢰하던 러시아 비평가를 통해 마티스를 만난다. 예상하 건데, 마티즈는 뛰어 언변으로 자신이 분명 세기에 남을 중요한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러시아의 부호 슈킨을 설득했을 것이다. 마티즈의 언변에 매료된 슈킨은 자신이 훗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세기에 남을 예술가를 후원할 수 있다는 설렘에 들떠 마티스에게 작품을 몇 점 주문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슈킨이 마티스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슈킨의 주문에 따라 폭이 5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마티스는 <Dance II>와 <Music> 두 점을 1910년경 완성한다.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슈킨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모스크바에서 파리로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Dance II>와 <Music>, 두 작품을 보고, 이내 구입을 취소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호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눈에 예술작품이 돈을 주고 버려야 하는 대형 재활용품 쓰레기처럼 보인다면 구입하지는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대부분의 콜렉터들은 최소한 자신의 눈에는 미적으로 ‘아름답다’라고 여겨지는 것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혹시 슈킨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이쯤에서 슈킨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자. 1910년경 당시 파리 화단은 퓌비드 샤반느를 필두로 신고전주의의 아름다운 아카데미즘 화풍이 다시 유행을 하고 있었다. 파리 시민과 대부분의 미술 관계자들은 인상파가 망쳐 놓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하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마티스가 기괴스럽기 짝이 없는 두 작품 <Dance II>와 <Music>을 살롱도톤느에 선보였으니 여론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자, 보시라, <뮤직>의 기괴함을. 당신이 이 작품 앞에서 서 있다고 가정해 보고 함께 작품을 관람해 보자. 


이 작품은 폭이 약 4미터, 높이가 2미터 60센티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약 1미터의 폭에 한 명씩 위치해 있으며, 가장 오른쪽 끝에 앉아있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미터가 넘는 높이에 위치해 있다. 당신의 키가 2미터가 넘지 않는다면, 검은 눈동자와 검은 입을 한 기괴하게 생긴 5명의 거구의 인물들이 동시에 당신을 잡아먹을 듯 내려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불편한 시선에 벗어나고자, 당신은 곧 배경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런데, 청색과 녹색의 삭면으로 이루어진 배경에는 당신의 시선이 침입할 공간이 없다. 그 흔한 자연의 풍경도 찾아볼 수 없으며, 심지에 원근법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2차원의 색면(Color Field) 덩어리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금 놀랜 당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날 것이다. 멀리서 보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멀리서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5명의 기괴한 거구가 동시에 나를 쏘아보고 있고 시퍼런 배경 또한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 당신은 다시 한번 오싹해질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당신이 나와 함께 이렇게 느꼈다면, 당신은 마티즈의 의도대로 작품을 관람한 것이다. 마티즈가 이 작품을 통해 의도한 것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자의 시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마티즈는 우리가 이 작업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회화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카데미즘 회화는 아주 친절한 동화책처럼 작품 속 풍경과 인물, 구도, 배경 등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나아가 이러한 아카데미즘의 회화의 인물들은 절대로 관람객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며, 관람객이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자신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마티즈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는 관람자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전통적인 회화에 전복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심지어 작품이 제작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신은 이 작업을 바라보며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도 이런데, 100여 년 전에는 어땟을까? 아래, 퓌비드 샤반느의 작품을 보자. 


Pierre Puvis de Chavannes: The Sacred Grove Dear to the Arts and Muses – 1884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미의 기준이었던 것이고 화가라면 응당 이러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저렇게 커다란 캔버스에 당시로서는 해괴망측한 그림을 그려놓았으니 대중이 분개하고 후원자가 돌아섰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여론의 비난과 간사한 화상들의 속삭임에 슈킨은 마티즈에게 등을 돌리고 결국 샤반느의 작품을 구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3.

두터워 던 신뢰를 보여주던 슈킨이 등을 돌리자, 마티즈는 길이길이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림이 나를 거리로 내몰았어!” 


생각해 보면, 당시 미술계의 악동이 덨던 마티즈가 이 정도의 사건으로 화를 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아방가르드, 그러니까 예술의 저 끝, 최방 위에 서있는 작가들에게는 이 정도 배신과 비난은 의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티스도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슈킨이 주문을 취소하기 하루 전에 마티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에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패기 넘치던 마티즈 역시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슈킨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마티즈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여론과 화상들의 설득에 못 이겨 마티즈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 이전에 인간관계의 신뢰를 저 버렸다는 생각에 슈킨은 괴로워했던 것이다. 결국 슈킨은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퓌비의 작품 구입을 취소하고 마티즈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경솔함을 용서하고 두 작품 <Dance II>, <Music>을 자신에게 조속히 보내달라고 간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언젠가 이 작품들을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


물론 마티즈는 슈킨의 배신과 화상들의 간사함에 몸서리를 치며 한 달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우리는 슈킨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마티즈를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슈킨은 마티즈의 두 작품 <Dance II>, <Music>을 끝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마티즈를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만든 것은 슈킨도 화상도 평론가들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비록 후원자의 변덕과 화상들의 간사함에 치를 떨기는 했지만, 마티즈는 1910년 당시 화단에서 끊임없는 자신의 작품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십 대 초반이었던 그가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작업 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람이 <Dance II><Music>에서 보이는 거대한 배경의 색 면을 비난하고 야유를 보낼 때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아! 1제곱센티미터의 파란색은 1제곱미터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단 말이야!” 


마티즈의 이런 맹목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마티스는 없었다. 작은 캔버스에서 보는 파란색과 대형 컨버스에서 경험하는 파란색이 다르고, 이것이 훗날 미술사에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는 그의 맹목적인 믿음이 그를 거장으로 이끈 것이다. 자신이 작업이 분명히 미술사의 역사를 뒤집을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며,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고야 말 것이라는 그 고집스럽고도 맹목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천재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어떤 위대한 천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하다. 그리고 당신이 매우 운이 좋다면, 슈킨과 같은 후원자의 맹목적인 믿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티즈를 봐라! 아무리 슈킨이 그가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들 그가 그것에 만족했을까? 아니다. 결국은 마티스 스스로가 자신을 믿은 것이다. 마티즈나 우리나 각자 인생이라는 황무지에 던져져 있고 그곳에서는 결국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도 당신이 잘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되뇐다. 

‘내 선택이 맞았어! 나는 여기로 잘 왔고, 여기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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