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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Sep 28. 2023

아빠와 토마토 나무

오랫동안 미뤄뒀던 숙제가 끝났다.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제 그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혹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일 수도 있다. 아빠에 관해서라면 나는 항상 말을 아꼈다. 엄마가 집 앞 작은 언덕에서 매일 뛰어노는 공원 같았다면, 아빠는 입구부터 포기하고 싶어지는 산세가 아주 험한 산과 같았다. 행동과 말, 모든 면에서 아빠는 미니멀했다. 어린 시절 아빠와의 대화는 대체로 불가능했다. 대화라기 보단, 일종의 보고 혹은 형식적인 인사가 전부였다.  


내가 아빠에게 했던 말은 주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혹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혹은 ‘다녀왔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요약할 수 있다. 아무리 천천히 말한다 해도 이런 종류의 대화로는 하루에 5분 이상을 넘기기 힘들다. 


르네 마그리트, The son of the man, Oil on Canvas, 86*116, 1964

1.

45년 동안 아빠와 단 둘이 나눈 대화의 시간을 합하면 얼마나 될까? 대략 다섯 살 경부터 본격적으로 말문이 트였다고 가정했을 때, 365일 동안 매일 5분을 합하면 대화시간은 대략 1825분으로 30시간이 조금 넘는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1년 동안 아빠와 대화를 나누었던 총시간은 기껏해야 하루가 조금 넘는다. 그나마도 예순을 넘어 부모님이 고향의 시골집에 내려가시고 따로 살면서 점차 횟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결혼 후에는 분기별로 인사를 드리는 게 전부였으니 아무리 관대하게 시간을 계산한다고 해도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빠와의 대화 시간은 한 달이 넘지 않을 것이다. 


요즘에야 딸바보 아빠들이 대세이지만, 유교사상에 기반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굳걷했던 40년대에 태어난 나의 세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이 소위 말해 ‘샤이(Shy) 딸바보’였다. 그리스 신화 속 저주받은 이들처럼 그들은 용암처럼 넘쳐흐르는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가졌지만 그 사랑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혹은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이었다. 나의 아빠도 이런 저주 걸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Decal, Lithography on BFK Rives paper, 45*60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숙제를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 처음 마주하는 것이 부모이고, 그렇게 갓난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아이는 자신의 모든 언행의 결과를 부모의 감정을 통해 확인한다. 주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지가 아이들의 삶의 과제이다. 이렇게 나에게도 유년 시절 삶의 과제는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특히 아빠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숙제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내 커리어를 쫓느냐 그리고 남편을 만나고는 내 가정을 꾸리느냐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아빠는 내 인생 최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사이 젊었던 아빠는 노인이 되어있었다. 매섭고 차가웠던 눈매에는 무거운 커튼이 덮였고, 단호하고 확신에 찼던 무채색의 말투는 어느새 부드러운 파스텔톤으로 변해있었다. 


제2의 인생을 살겠노라며,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남편과 부다페스트를 이주를 한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염려를 했지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염려는 곧 딸을 자주 보지 못하리라는 아쉬움으로 변했다. 이십 년 전 여동생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제 미국 시민이 되어 살고 있기에 나까지 외국으로 간다는 말에 아빠는 상심했던 것 같다. 이주해도 서울에 자주 올 것이라는 말로 아빠를 위로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때는 한국이 영원한 집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나의 집은 이제 부다페스트에 있다. 한국에 가는 것이 여행이 되어버린 이상, 열 시간을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은 서울에 살 때 유럽여행을 가는 것과 같은 큰 어젠다가 되어 버렸다. 이주를 하고 가끔 전화를 드렸지만 아빠는 그저 밥은 잘 먹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만 간단하게 물어보았고 우리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아빠가 대학원 졸업식을 핑계로 엄마와 함께 부다페스트에 왔다. 저주가 풀린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딸을 찾아 나선 것일까? 기내용 슈트 케이스에 간단히 짐을 싣고 온 부모님은 약 3주간 머물렀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쌍둥이로 태어난 덕에 한 번에 두 명의 동생을 얻는 행운을 누렸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그들과 나누어야 했다. 태어난 서열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은 공평하게 나누어졌다. 음식부터 부모님의 사랑까지. 내 몫으로 지정된 것 이외에 전부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45년의 인생 처음으로, 부모의 사랑을 그 누구와도 나눌 필요 없이 독식해도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2.

아빠는 90년대 초에 유럽으로 학회를 다녀오면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이후 30년 만에 유럽 방문이었고 우리는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같은 헝가리와 인접한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이곳 지리도 언어도 익숙지 않은 아빠는, 마치 과거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한 출연자처럼 어딜가건 앞장서서 직진을 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바키아는 나와 남편도 처음 가는 곳이었고, 구글 맵에 의존을 하며 긴장을 하며 목적지를 찾느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구글 맵은커녕 종이 지도도 없는 아빠는 이곳에서도 혼자 앞서 걸어갔다. 혼자 앞서 가지 말고 우리를 따라오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말하는 순간뿐이었다. 낯선 곳에서 혹여 아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앞서가는 아빠에게 달려가 얼른 팔짱을 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대화는 이내 물 흐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빠, 저기 보이는 건물이 대성당이에요. 참 아름답죠?”

“응. 참 대단하다. 유럽이 정말 선진 국가였지. 그때만 하더라도 말이야. 1800년대 한국을 생각해 봐라. 이런 건축양식은 생각도 못했지.” 

“아빠, 피곤하지 않아요? 좀 쉴까요?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면서?” 

“그래. 그러자. 좀 쉬자. 엄마도 힘들 거야.” 


그렇게 우리는 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는 숙소로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도 아침에 일어나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이어졌다. 

여행을 하고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어느 주말 아침, 부모님을 모시고 집 앞에서 열리는 야외 장터에 갔다. 유럽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싱싱한 야채, 과일과 치즈, 베이커리류를 파는 일종의 파머스 마켓인데 저렴한 가격에 품질도 좋아 평소 남편과 자주 가는 곳이었다. 도넛 복숭아, 블루베리, 라즈베리와 커다란 수박을 한 덩이 사고 있는데 왜인지 아빠가 각종 채소 모종을 파는 상점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아빠, 이제 가요. 다 샀어요.”

“응. 잠깐만. 이리 좀 와봐라.”

“네. 왜요?”

“이게 토마토 모종 같거든. 이것 좀 사자.” 

“네? 갑자기 웬 모종이에요?”

“응, 너희 집 발코니에 두고 키워봐. 식물 키우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 아빠가 심어줄게.” 


작은 발코니가 있는 우리 집에는 덩그러니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 두 개 그리고 에어컨 실외기가 놓여 있다. 발코니가 바로 보이는 방을 사용하시던 부모님이 보기에 뭔가 쓸쓸해 보였던 모양이다. 집 근처에는 마땅히 화분을 살 곳이 없었고 아빠는 생수병과 컵라면 용기에 작은 구멍을 내어 화분을 만들어 토마토 나무를 심었다. 3주 내내, 아빠는 눈을 뜨면 토마토 나무를 확인하고 물을 주는데 열심이었다. 여행을 갈 때도 물을 흠뻑 주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고, 여행을 다닐 때도 토마토 나무의 안부를 걱정했다. 덕분에 아빠가 출국하기 전 몇 나무에서 토마토가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3주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여행을 마친 엄마와 아빠는 어느새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잘 도착했다는 문자와 함께 여행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들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음에 새삼 놀랬다. 아마도 아쉬움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이 많았던 탓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3주의 시간 동안 아빠와 나누었던 대화의 정도는 우리가 평생 동안 나누었던 대화의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의례 그랬던 것처럼, 여행 이후 우린 가끔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대화에 변화가 생겼다. 밥은 잘 먹고 아픈 데는 없는지만 물어보던 아빠가 전화를 받자마자 토마토 나무에 물은 줬는지, 토마토가 얼마나 열렸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라, 해가 너무 강하게 내리 쐬면 안 되니 그늘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등 한참을 토마토 나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단지 두 문장으로 끝났던 아빠와의 대화가 길어졌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나의 숙제가 끝났음을. 토마토 나무는 아빠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로이스 타이슨은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의 7장에 구조언어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쉬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주어진 소리 이미지와 그것이 지시하는 개념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도 없다는 말이다. 나무라는 개념이 ‘tree [영어]’나 ‘arbre [프랑스어] 대신 ‘나무’라는 소리 이미지로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책이라는 개념은 ‘책’ 외에도 ‘book [영어]’이나 ‘livre’[프랑스어]라는 소리 이미지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단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일 뿐이며, 이것은 어디서든 마찬가지다.”(449)


그러니까 기표, 언어의 소리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이 실제 사물이 아니라 머릿속에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페이퍼를 썼던가. 언어가 가진 모순에 대해. 그런데 나는 여태껏 아빠와 내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서로 다른 기표를 사용했던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사랑’이란 개념은 ‘우리 딸’과 같은 소유 명사, 혹은 ‘사랑한다’ ‘보고 싶다’라는 동사의 형태로 각인되어 있었고, 아빠에게 ‘사랑’이란 개념은 ‘밥’, ‘건강’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사랑을 표현하면 안 되는 저주에 걸렸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우리는 서로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이곳에 토마토 나무를 심어 주기 전까지 서로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아빠가 ‘토마토’라고 말을 할 때 그것은 라이코펜에 의해 붉은색을 띠는 식용 목적의 가지과 식물의 열매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일하게, 아빠가 ‘밥은 잘 먹었는지’과 ‘건강은 어떤지’를 물어보는 것도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을 잘 소화시켰는지, 지금 건강 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아빠가 ‘밥’, ‘건강’, ‘토마토’를 물어볼 때, ‘우리 딸,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빠는 토마토 나무를 심어주고 가면서, 자신의 사랑을 이곳에 두고 간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 모른다. 소중한 것이 소중한지. 특히 가족의 경우 그러하다. 아빠와 나는 서울과 부다페스트라는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비로소 서로의 사랑에 대해 표현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주를 통해 얻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중한 기쁨 중에 하나는 아빠와의 대화였다. 이주는 이렇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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