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면,
하고 싶던 일들을 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시작하라.
-파울로 코엘료-
내가 필리핀으로 떠난 직후, 아버지는 속이 불편하다고 죽만 드셨단다. 원래는 물에 밥을 말아 드셨는데. 참다못한 어머니는,
"병원 좀 가보세요."
라고 말하셨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생각해 보면, 내가 전역하는 날도 그랬다. 고기 한 점 안 드시고, 물에 밥만 말아 드셨으니. 사실, 나는 '바로 취직 준비를 안 하는 내가 못마땅하셔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배를 움켜잡고 쓰러지셨고, 동생이 급하게 병원으로. 그 와중에도,
"가스 활명수 먹으면 괜찮아지는 데, 왜 이리들 난리야."
고집을 피우셨고,
"적당히 좀 하세요!"
평소, 화를 안 내는 동생이 소리쳤단다. 그렇게 동네 의원을 가셨는데,
'우리 병원에서는 진단이 힘들어요. 큰 병원으로 가세요.'
대학병원을 갔더니 이미 위암 4기로 진행되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모든 일이 내가 여행가 있는 2주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다. 여행 가서 있는 나에게는 말하지 말자고. 어차피 오면 알게 되니까. 어머니가 그리 말씀하셨고, 동생도 동의했단다. 집에는 동생만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중이란다.
"하아. 다시, 괜찮아지실 가능성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있겠지. 기적이 있다면. 오늘 같이 가자. 형도 이제 간병 시작해야지."
동생이 덤덤하게 말한다.
"기적까지 필요할 정도야?"
"응. 위암 4기라는 말은, 최초 암 발병 부위가 '위'일 뿐, 다른 장기에도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도 쉽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 의사가."
"그래. 그렇구나. 알았어."
아직 비현실적이지만, 동생과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거기 있었다. 집에 계실 때처럼 누워서. 코와 팔에 껴 있는 호스를 제외하면 다르지 않았다. 평소 모습과.
"왔니. 여행은 재미있었어?"
"네."
"이제 취업 준비해야지. 더 늦어지면 괜찮은 회사 못 들어가."
이 지경이 돼서도, 한다는 소리가 고작.
"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버지도 진즉 검사 좀 받지 그랬어요. 어머니가 계속 말씀하셨잖아요."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나."
실없이 웃는 아버지의 미소가 슬펐다. 소리치고 싶었다. 장난하냐고. 아버지 빼고 다 알았다고. 그리될 줄. 허나, 참았다. 아버지 앞에서는 매번 참는다. 어쩔 수 없다. 예전에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대학교 때,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왔다. 제일 먼저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아침에 학교 갈 때 그 모습 그대로, 티브이 앞에 누워 계신 아버지. 울화통. 사전적 의미로는, 몹시 쌓이고 쌓인 마음속의 화. 그게 터져버렸다.
'아버지! 좀 티브이 좀 그만 보고 밖에 나가세요. 제발요. 뭐라도 하세요. 어머니, 마트에서 매일 마감까지 일하시잖아요. 어머니 안 불쌍해요? 아버지가 가장이시잖아요. 바보상자라고 하셨잖아요. 티브이는 바보상자라고 저희 못 보게 하셨잖아요. 근데, 왜 아버지는 그 바보상자만 붙들고 계시냐고요!'
바보상자. 아버지는 티브이를 그렇게 부르셨고, 가끔 동생과 내가 티브이를 보면 병적으로 싫어하셨다. 그 덕분인지 나와 동생은 아직도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 헌데, 당신께서는 실직하고 10년 동안 집에서 티브이만 보신다. 언행 불일치. 본능적인 혐오감.
"너. 지금 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아버지는 입술을 떨며 말씀하셨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정신 좀 차리세요. 제발!"
다른 일은 안 하신단다. 한때는 비디오 납품가게 사장이셨기에, 사장 정도 직급이 아닌 다른 일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사장이셨던 사실도 맞지만, 시대가 변했다. 비디오 납품 업무 경험 자체가, 필요 없는 시대다. 그럴진대, 그때 같이 일하던 지인들과 부하직원 보기가 부끄러워 다른 일은 못 하시겠단다. 차라리 놀면 놀았지. 더 참으면 내가 병날 듯하여, 결국 터뜨렸고, 아버지는 나를 노려봤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기껏 키워줬더니, 그딴소리나 하고. 싹수없는 놈.'
그러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셔서 들어오지 않았다. 밤 12시간 넘어도 안 들어오시는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이 나를 나무라고,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 근처를 둘러봤다. 전화가 왔다. 새벽 1시. 집 근처 호프집주인이란다. 거기 아버지가 뒹굴고 계셨다.
'하루 종일 술 먹고 주무셔서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로 했어요. 조금 있으면 가게 문 닫을 시간이라.'
아버지는 인사불성으로 중얼거렸다. 죽어 버릴 거야. 죽어 버릴 거야. 난 살 가치가 없어. 아들에게 그런 소리나 듣고.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조심한다. 말을 조심하다 보니, 말하지 않게 되고, 말하지 않으니, 말이 없는 관계가 되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억지로 담담한 척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지금으로 되돌렸다.
"아녜요.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기적이란 게 있으니까."
"기적이 흔하면 기적이냐. 평생, 나에게는 그런 거 안 왔어. 의사가 6개월 남았다고 하니까, 뭐 이제 끝이지. 항암치료와 식이요법을 하면 더 오래 살 수도 있다는 데, 그럴 필요가 있나. 순리대로 가야지."
"......"
나쁜 소리 할 뻔했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참았다. 그렇게,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주간에는 내가 아버지를 간호하고, 야간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번갈아 가면서 간호했다. 다시 자정이 되면 내가 교대해서 병원에서 잤다. 백수니까. 어머니와 동생은 일해야 하니까. 아버지 시간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볼품없이 말라가고 있었기에.
"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소변 통도 주기적으로 비워줘야 하고, 자세도 바꿔 주었다. 아버지 침대 옆, 간이침대는 비좁았고, 백수로 간호하는 내 모습은 먹먹했다. 구멍이 생겼다. 절망이 스며든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모두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경제적 구멍은 군장학금으로 막았으나, 이 구멍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툭. 툭. 툭.-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많이 내렸다. 그날도 역시 간이침대에 누워 취업사이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미안하다."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빗소린가?
"네?"
"미안하다고."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씀을, 일평생 하지 않았다. 뭐든지 남 탓, 네 탓. 그런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자세히 보니 울고 계셨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울고 계셨다.
"명욱아. 정말 미안해...... 나도 이렇게 살게 될지...... 이렇게 가게 될지...... 몰랐어......"
할 말을 잃었다.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이 뜨거웠다. 뺨도 따뜻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기에.
"아니에요."
-툭. 툭. 툭-
다시 빗소리. 순간, 마법 같은 밤이 시작되었다. 암 병동은 원래 신음으로 가득하다. 사방에서 들리는 절망의 소리. 헌데, 비와 함께 모든 신음이 멈췄다. 신음이 멈추자, 그 자리를 평온한 소리가 대신했다. 창문을 노크하는 빗소리, 나무를 어루만지는 바람 소리, 안정된 아버지의 숨결까지.
"명욱아."
아버지는 실직하기 전, 그 강하고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살아오신 과거와 살아가고 싶었던 미래를. 아버지 관점에서의 나와 동생,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 살아오며 나눈 대화보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갔으며, 나는 웃었다. 아버지와 함께. 어릴 때 이후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미뤘어. 미루다 보면, 때가 오겠지. 확신했어. 그때를, 나는 알 수 있을 거라 확신했어."
"......"
"헌데, 그런 순간은 없어. 나 같은 사람은, 죽기 전에야 알게 되지. 그때는 없고, 더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다만, 한탄만 할 뿐이야. 되돌리고 싶다고......"
말씀에는 힘이 있었고, 생기가 있었다. 기적은 없다고?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죽어가던 사람에게 활력이 돌고, 신음으로 가득했던 암 병동에 빗소리가 들리는, 지금 이 상황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그리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혹시 기적이 도망갈까 봐. 기적은 수줍음이 많아, 잘 나타나지 않으니.
"저도 아버지에게 미안해요.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이렇게 되기 전에 알았을 텐데요."
"하핫. 그게 네 탓이냐. 내 탓이지. 내 고집을 누가 꺾냐. 오죽하면, 부처 같은 네 동생이 화냈겠냐."
"그건 그래요."
동생은 화내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나와 다르게.
"그래. 살다 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있어. 아쉬운 순간들이......"
-툭. 툭-
소변 팩이 꽉 차는 소리.
"아버지 소변 팩 좀 비우고 올게요."
"그래......"
소변 팩을 비우고 돌아오니, 마법은 사라졌다. 비는 그쳤고, 암 병동은 다시 신음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 역시, 다시 티브이를 보던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피곤하구나......"
더 이상 그런 순간은 없었다. 기적은, 부끄러운지 다시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옮기셨고, 거기서 생을 마치셨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를 위한 눈물은, 비 오던 날 '미안하다'는 말씀에, 모두 흘린 모양. 장례식이 치러졌고, 승철이와 석관이, 멀어졌던 성중이까지 왔다.
"힘내. 명욱아."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장례식이 끝났다. 사람들은 많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 나, 동생 지인들이 대부분. 남들 시선과 체면을 그리 신경 쓰시던 아버지셨는데, 당신의 지인들과 부하직원들에게는 호인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물론, 집에 오래 은거하신 탓도 있지만, 허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씁쓸하네요."
다만, 허전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동안은 그렇겠지. 우리 가족을 서서히 침몰시키던 절망은 사라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하고, 배에 난 구멍은 어찌 되었든 메워진다는 사실을. 흉터는 남겠지만.
아버지가 핸드폰에 나를 뭐라고 저장해 놨는지, 기억난다. 새벽 1시 호프집.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를 부축할 때,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아버지는 단지,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운 아들'.
아버지 폰에, 내 이름은 그렇게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노를 젓는다. 바닥을 메우며, 방향을 잡으며, 나아간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도착하겠지. 내가 원하는 어딘가에.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