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보다 멍 때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일하는 시간이나 공부하는 시간엔 그 일에 집중하고, 또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보상심리로 ‘쉰다’라는 기분을 내려고 유튜브나 스트레스를 받게 하지 않는 어떤 것들에 또 집중하곤 한다. 한국인의 뿌리를 둔 우리는 시간을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 킬링 타임이라고 생각되는 시간마저도 우리는 목숨만은 살려 두는 민족이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고유한 생각 흐름보다는 알고리즘이 내미는 손을 잡고 함께 돌아다니며 언젠간 필요할 수도 있는 정보들을 모으러 인터넷 세상을 누빈다. 그렇게 한참 돌아보고 난 후엔 왜 인지 눈은 뻑뻑하고 마음은 퍽퍽하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가끔 머리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다고 소리칠 때가 있다. 그럴 땐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이나 사람이 없는 새벽, 산책이라고 하기엔 하염없이 걸어보곤 한다. 주변은 소리가 묻힌 듯 고요하고 아무의 개입 없이 온전히 나의 생각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또 막상 걷다 보면 원래 하려던 특정한 생각보다는 좀 더 모호한 어떤 것에 생각이 달라붙는 것을 느낀다. 근래엔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 일은 내 의지에 따라 될 수도 의지와 상관없이 안될 수도 있는 운명적인 일이면서도 1년 동안 준비한 수능을 끝내고 나온 결과로 어느 대학을 갈지 고르는 일만큼이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도 철이 없어도 한참 없는 내가 과연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엄마, 아빠를 포함해 주변에 많은 부모님들이 해냈듯이 나도 해낼 수 있는 일일까?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가만, 그나저나 애초에 준비를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염없이 고민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엄마가 될 입장에서 운이 좋다고 표현해야 할지, 살면서 정 반대의 두 엄마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마음으로 키우는 엄마(할머니)는 늘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많았다. 반대로 현실적이고 냉철한 엄마는 언제고 자신이 힘든 일을 내색하는 일 없이 혼자서 강인하게 이겨내곤 했다. 지금 만약 엄마가 되어야 한다면 두 분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따름이지만 어릴 땐 그저 어떤 사람이 정말 나의 엄마일까 혼란스럽기도 했다. 사람이란 참 영악한 것이 엄마의 입장에선 냉혹해야지 만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정작 내가 마음이 힘들고 약해진 순간엔 현실적인 엄마는 때론 현실보다 더 혹독하고 차가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또 현실적인 문제들에 허덕일 땐 마음만 써준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게 느껴지고도 했다. 극과 극의 두 엄마였지만 눈에만 보인다고 이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무엇 하나 맞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주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데 예전에 번지점프를 하며 생긴 고소공포증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보며 같이 뛰게 될 파트너 선생님 앤디가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해본 적이 없어서 알지 못하는 상태, 바로 그게 두려움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해 줬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엔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무섭고, 떨어지는 순간에도 무서울 거라고. 낙하하며 정신없이 흔들리는 그 순간엔 이게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정신이 없고 아찔할 테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낙하산을 편 후 평정심을 찾는 순간 보이는 풍경은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울 거라고. 그래서 내가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그것은 아직도 미궁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상황에 맞추어 이런 엄마가 되어있을지도, 저런 엄마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이렇게 모르고 있는 게 약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