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의 모습을 한 아이들로서 다섯 가지 사명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자애로운 토타신의 축복과 인내를 누릴 수 있다.
하나, 우리는 토타를 닮은 이들을 사랑한다.
둘, 우리는 풍요로움을 기쁘게 나눈다.
셋, 우리는 힘을 이로운 곳에 쓴다.
넷, 우리는 슬픔을 함께 짊어진다.
다섯, 우리는 외로운 이에게 손을 내민다.
린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벽 한가운데 걸린 나무판자를 천천히 훑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은 글씨를 따라 좌우로 움직였고 입에선 나지막한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판자 위에는 어제 하델이 공들여 쓴 토타의 다섯 가지 교리가 스며 있었다. 린델은 눈을 감고 액자에 코를 가까이 댄 채 숨을 한껏 들이켰다. 나무의 향긋함이 아직 날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집안을 감싸고 있는 햇살버들이 바싹하게 마른 향도 함께 느껴졌다. 말린 햇살버들은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면 집마다 찬장이나 창고에 꼭 보관하는 식재료 중 하나다. 이곳의 기후는 대체로 청명하고 시원한 편이지만 한겨울 밤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다. 따라서 토타족은 겨울을 날 때 햇살버들을 꼭 말려 둔 다음, 잠들기 전 차로 우려내 마셨다. 그렇게 하면 반나절 동안 몸이 후끈해지며 열이 나기 때문이다.
콧속 점막을 따라 따스하게 달라붙은 햇살버들 향을 만끽하고 있던 린델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가린이었다.
“우리 린델, 이제 다섯 가지 교리도 잘 외우네.”
“외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이제 9살이라서 글씨를 잘 읽을 수 있어요.”
“자주 읽으면 교리도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가린은 그렇게 말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눈물초 열매를 손에 쥐여줬다. 사계절 내내 캘 수 있는 작물이라서 토타족의 집 어느 곳을 방문해도 마당 한구석엔 눈물초를 기르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생으로 먹을 땐 향긋함이 강하고 수분이 많아 보통 과일과 곁들여 먹고, 때로는 구워서 수분을 바짝 날린다. 살짝 타서 거뭇거뭇해진 껍질을 벗긴 후 한 입 먹으면 구수한 맛이 났다.
린델이 열심히 우물거리는 사이, 집 밖에서 “린델! 얼른 가자.”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안이었다. 토타족의 아이들은 일주일에 나흘, 학교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회의장으로 더 자주 사용하고, 강당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건물에서 진행하는 수업에 참여한다. 배우는 과목은 따로 정해져 있진 않지만 보통 채집과 식물, 농사, 건축, 건물 보수 등 공동체 생활을 하며 꼭 필요한 기술들을 공부하고, 가끔은 체험 학습을 나가는 식이다. 선생님은 마을 어른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자처했기 때문에 매년 똑같은 수업을 듣는 건 아니었다. 배운 내용을 또 배울 때도 있었다. 오늘은 린델의 집에서 열 걸음만 걸으면 바로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옆집에 사는 로안이 일일 선생님으로 초빙된 날이라 함께 등교하기로 했다. 로안은 주로 토타족의 전설과 역사를 가르치거나 토타족의 구성원으로서 배워야 할 자세, 혹은 교리에 대해 알려주곤 했다. 린델은 로안이 가르치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 수업이 항상 유쾌하게 진행됐고, 본인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린델은 입에 남은 열매를 꿀꺽 삼킨 다음, 문을 열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달음박질했다. 손을 오목하게 모아 깨끗하고 차가운 물을 가득 받은 다음, 마당을 빼곡히 채운 풀 위로 흩뿌렸다. 그리곤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다. ‘오늘도 토타의 자애로움이 함께하길.’
“다녀오겠습니다!”
수도꼭지를 황급히 잠근 린델은 울타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로안에게로 뛰어갔다.
학교는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린델이 교실로 들어가니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아이들이 전부 모인다고 한들 머릿수가 많은 건 아니었다. 로안이 교실 앞에 서서 벽을 가볍게 통통 두드리자 시끌시끌하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자, 오늘은 보호소의 역할에 대해서 알려줄게. 먼저 보호소는 누가 갈 수 있는지 아는 사람?”
아이들이 경쟁하듯 “주춤이요!” 하고 외쳤다. 로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그럼 이 중에 보호소에 가고 싶은 사람?”하고 물었다.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린델도 작게 웃으며 같은 반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둘러봤다. 다들 엉덩이 위로 길고 튼튼한 꼬리가 쭉 뻗어 있었다. 린델은 고개를 뒤로 돌려 본인의 꼬리를 슬쩍 바라봤다. 또래보단 약간 얇고 길이도 짧은 편이긴 하지만 크게 문제가 있거나 튀는 정도는 아니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는 꼬리로 중심을 잡는단다. 꼬리를 지면에 단단하게 고정한 채로 높이 뛸 수도 있고, 다리와 꼬리 힘을 이용해서 무거운 물건도 멀리 던질 수 있어. 하지만 주춤이들은 꼬리가 없기 때문에 한 발짝 떼는 것조차 힘든 경우가 많아.”
로안이 한 발을 앞으로 떼더니 곧 과장하며 휘청거리다 넘어지는 몸 개그를 선보였다. 교실 안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린델은 이렇게 유쾌한 선생님과 옆집에 산다는 걸 상기하고는 괜히 우쭐해졌다.
“중심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무거운 물건도 잘 못 들고, 힘도 약하단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서 살게 되면 어떻겠니?”
“다쳐요!”
“힘들어요!”
아이들이 힘차게 각자 답을 외쳤다.
로안은 미소를 지으며 “맞아. 쉽게 다칠 수 있어. 그래서 보호소로 보내 위험을 줄이는 거란다.”라고 말했다.
그때, 린델이 용기 내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