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에는

선율에 고스란히 담긴 한 폭의 풍경

by 이준봉

주말에는 비가 오네요. 어느덧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 3월 중순입니다. 추위는 자리를 떠나고 따뜻함이 반갑게 인사라도 하듯이 봄비가 내렸습니다. 굳이 우산을 들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땅만 가벼이 적신 부슬비였는데요. 저는 이렇게 살포시 빗방울이 내리는 날이면 항상 떠오르는 음악과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마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겁니다. 무려 십수 년이 흘렀습니다만 아직도 당시의 선명함은 흐려지지 않았네요. 오늘은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날의 추억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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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저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소위 말해서 모태신앙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교회에 간다는 것은 제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심한 성격에다가 말수도 별로 없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아 했죠. 또,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만 가다 보니까 그렇게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주 교회에 가더라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이 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올 때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제가 예배 시간 이외에 말을 몇 마디 하나 세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부모님께서 교회에 가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날이 대다수였습니다.


어렸을 적에 교회를 다녀보신 분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예배가 끝나면 학생들은 각각 자신이 속한 반에 가게 됩니다. 마치 학교와 비슷하게 말이죠. 그래서 누구는 이를 ‘주일학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저 또한 어렸을 때 예배가 끝나면 항상 어떤 선생님을 보곤 했답니다. 제 또래 나이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모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갔지요. 그 시간에도 저는 주로 말을 주도하기보다는 시키는 말에 대답만 짧게 했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교회라는 공간은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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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겨울에서 봄을 지나는 학기 초쯤이었습니다. 마치 요즘과 같이 말입니다. 그때는 제가 초등학생 5학년인가, 6학년 정도 되었으니 약 십수 년 전의 일이네요. 새로운 학기가 다가오면 교회의 선생님도 다른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날은 전년도의 선생님께서 담당했던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밥을 사주신다고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한가한 토요일 점심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괜히 가서 말도 없이 밥만 먹고 돌아오느니 그냥 집에서 편하게 있는 게 더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약속인 만큼 우산을 손에 든 채,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흐린 토요일 오전 시간대라서 그랬던 것일까요? 약속 장소에는 그리 많은 학생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학생들은 3명 정도, 그리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순간, ‘와서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보다 인원이 적었다면 선생님께서 더 실망하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근처의 돈까스집으로 향했습니다. 돈까스 세트를 하나씩 먹으면서, 같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이 적은지라, 저도 어느 정도 말을 꺼내게 되었습니다.


교회 선생님의 말씀과 표정에는 상당한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이번이 마지막으로 선생님으로 섬기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셨을 것 같습니다. 일 년 동안 함께 지냈던 순간을 돌아보면서 얘기하니까 어느덧 밥도 다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따로 어디를 가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바로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저와 친구들, 선생님은 서로 인사하고 각자 집에 돌아갔습니다. 교회와 관련한 모임에 ‘잘 갔다 왔다’라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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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이게 피아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저는 그날 밥을 먹으러 가기 바로 전까지 어떤 영화를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트와일라잇>(Twilight, 2008)이라는 영화였는데요. 제가 밥을 먹으러 나가기 바로 전에 등장했던 장면이 바로 남자 주인공인 로버트 패틴슨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서도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바로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이라는 피아노곡이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됩니다. 비가 촉촉하게 오는 그날에 감상했던 곡의 분위기는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슬거리는 비가 올 때면 이 피아노곡을 연주하곤 합니다.


교회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밥을 같이 먹었던 기억도 이 곡을 아련하게 느끼는 데에 한몫하였을 듯합니다. 그때의 좋았던 추억은 아직까지도 제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음악이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발견하였습니다. 음악은 내가 슬플 때나, 아니면 즐거울 때나, 그때만의 방식으로 특정한 기억을 형성합니다.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부정적으로 작용한 적은 거의 없었던 듯싶습니다. 슬플 때는 묵혀 있던 감정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고, 즐거울 때는 선율과 함께 좋았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인간은 행복해서 음악을 듣기보다는, 음악을 들음으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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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실은 저보다 먼저, 돈키호테가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음악이 있는 곳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Where there's music, there can be no evil.)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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