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만세 팀의 왕진이 있었다.
독일 병원 에는 왕진 Hausbesuch이라는 시스템이 따로 있다. 왕진이라 하면 환자가 계신 곳 즉 집 또는 양로원, 요양 병원 등으로 의료진이 직접 진료를 나가는 것을 말한다.
왕진은 크고 작은 모든 병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로 하면 1차 진료 병원 인 가정의 병원에서 주로 담당하고 있다.
독일은 주치의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가정의 병원이 1차 진료 병원 이자 마지막 진료 기관이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 사망선고를 하기 위해 집으로 왕진을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왕진의 대상은 주로 연세 많으시고 지병 등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 환자들 이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젊은 환자 여도 수술 등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고 응급인 경우 왕진을 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는 50대의 아주머니 환자가 넘어져서 다리 수술을 하셨는데 2층에 사시는 분이라 아직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병원으로 오시기 힘든 상황이라 왕진을 갔다.
물론 요즘은 가정의 병원이라 해도 모든 병원이 왕진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응급일 경우만 하는 병원들도 많고 병원 사정 등으로 그마저도 하지 않는 병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 병원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세명의 의사 가 바뀌며 그 자리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오래된 병원이라 왕진 진료 계획표가 따로 있을 만큼 왕진 환자가 많다.
처음엔 진료 가방 챙겨 들고 남의 집 안방까지 찾아가야 하는 왕진이 많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런데 4년 차로 접어들고 보니 이제 어느덧 이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있다.
오늘도 오전 진료 후에 왕진 가방을 챙긴다.
왕진 가방에 들어갈 것들 중에 가장 첫 번째 것은 환자 진료 카드다.
요즘은 컴퓨터 시스템으로 다 되어 있어 환자 진료 기록도 모두 컴퓨터로 하지만 왕진 갈 때는 환자 진료카드를 꺼내 들고 간다.
왜냐하면 왕진을 나갔을 때 환자들의 상황이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급히 처방해야 할 약 처방이나 정형외과, 심장내과, 안과, 피부과 등의 다른 전문병원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 소견서를 그 자리에서 바로 써 드리기도 한다.
그것을 위해 환자의 인적사항 등만 적혀 있는 공수표? 같은 처방전과 소견서를 미리 인쇄해서 간다.
또는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긴급히 이송할 일이 생길 때 사용할 병원 이송 확인서와 그때 같이 보낼 환자들이 그동안 수술 또는 입원 치료했던 질병 내역서와 평소 질환에 따른 약물 복용 계획서 등이 담겨 있다.
오늘 왕진 갈 곳은 네 군데다.
네 명의 환자 진료 카드를 찾기 위해 왕진 환자 진료 카드 칸을 열었다.
우리 병원의 칸칸이 나뉘어 있는 두 개의 무겁고 커다란 회색 서랍장 안에는 알파벳으로 나뉘어 있는 환자 진료 카드가 분류되어 있다.
그중 왼쪽 밑에서 세 번째와 두 번째 칸은 왕진 환자들 진료 기록 카드들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
네 개의 진료 카드들을 꺼내다 보니 아직 다시 분류하지 못한 다섯 개의 진료 카드가 눈에 띄었다.
독일은 법적으로 모든 환자 기록을 10년간 그리고 사망후 환자 기록을 5년간 폐기 처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즉 환자가 사망하셨어도 그 모든 기록을 5년간은 법적으로 병원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병원의 경우 사망 환자 진료 카드들을 하얀 상자에 따로 담아 지하 창고에 보관한다.
진료 카드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환자들...
나는 진료 카드 위에 오렌지 색 현광 펜으로 작은 십자가를 긋고 하얀 상자 안에 담는다.
그중에는 돌아가신 지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 가는 분도 있고 1년이 되어 가는 분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왕진을 갔던 분의 카드를 바로 흰 상자에 담기에는 마음이 아무래도 좋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 오늘 담아 넣었다.
진료카드에 예쁜 오랜지색의 십자가를 긋고 나중에 하얀색 통에 담는 것은 어쩌면
그분들을 추억 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인지 모르겠다.
오늘의 왕진 환자는 네 분 모두 90대다.
주소지로 왕진 일정을 나누었는데 우연히 모두 90대로 나뉘었다.거기에 다른 90대 왕진 환자들에 비해 건강 상태가 비교적 좋은 분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들을 장수만세 팀이라 부른다.
정기 왕진 계획표를 짜다 보면 주로 환자들이 계신 곳들 주소지로 나누어 일정을 정한다.
그래야 오고 가는 동선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한 분이라도 더 진료해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도 성별도 지병도 다르지만 비슷한 동네에 사시는 네 분은 모두 90이 넘으셨다
그중 최고령은 97세 랄프 할아버지 그다음은 94세 한스 할아버지 그리고 92세 베아테 할머니 다음은 91세 잉에 할머니.
나이순은 그렇게 되지만 왕진의 순서는 병원에서 제일 가까이 사시는 베아테 할머니부터 16시 잉에 할머니 16시 30분 한스 할아버지 17시 랄프 할아버지 17시 30분 순이다.
그런데 사실 시간을 이렇게 정해 놓아도 오고 가고
가서 진료해 드리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리게 마련이다.
특히나 장수만세 팀은 건강상태가 양호하신 편이라 왕진 가서 주로 이야기 들어 드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베아테 에 할머니는 작은 빌라에 혼자 사신다.
뜨개질이 취미시다. 할머니 댁 테이블보부터 벽에 액자 안의 꽃들도 모두 할머니 작품이다.
혈압 재드리고 혈액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큰딸과 손녀 중에 한 명이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심장내과 정기 검사 등을 모시고 다님을 알 수가 있다.
할머니는 "요즘 어떠세요?"물으면 무릎이 조금 아픈 거 빼면 이 정도면 됐죠 하며 환하게 웃으신다.
잉에 할머니는 베아테 할머니께서 두 블록 떨어진 빌라다.
그런데 이 빌라에는 여러 할머니들이 학생 기숙사처럼 함께 살고 계시는 공동체다.
1층에는 경비실처럼 생긴 사무실 하나와 공동 휴게실과 식당이 있고 2층부터 여러 개의 방 들고 나뉜다
할머니는 늘 공동 휴게실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커피 타임을 즐기신다.
오늘은 어느 할머니 생신이라 맛난 케이크도 있었다 한다.
이곳은 양로원이나 요양병원과는 달리 전문 간병인 또는 요양인 들이 상주하지 않는다.
모두 그 건물 안에서 만큼은 할머니 유모차를 밀고
다니 실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잉에 할머니를 웃음소리 가득한 공동 휴게실에서 만나 할머니 방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올라간다.
잉에 할머니에서 10분 정도 직진하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스 할아버지네 가 나온다.
한스 할아버지는 혼자 작은 빌라에 사신다.
전문 간병인도 집으로 다녀 가지만 70이 다 된 아들이 오토바이 타고 할아버지 식사를 배달해 드린다.
한스 할아버지의 아들이 병원으로 필요한 서류를 가지러 온날 하얀 머리의 노인이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우리 아버지 부탁해 놓은 서류를 가지러 왔다 해서 깜짝 놀랐다.
따지고 보면 그분도 70이 다 된 나이인데 한스 할아버지가 90이 넘으셨다는 것을 잊고 있다가 그분의 아들이 라는데 노인이 오셔서 말이다.
음악을 좋아하시는 한스 할아버지 집에는 멋진 앤틱 전축이 있다.
언제나 멋진 음악을 왕진 내내 틀어 주시고는 한다.
한스 할아버지 네 서 우리 집 쪽으로 오다 보면 랄프 할아버지네가 나온다.
랄프 할아버지는 작년까지 동갑 네기 할머니와 함께 계셨었다.
왕진 때도 두 분을 차례로 진료해 드렸다 늘 할머니가 앉아 계시던 의자 뒤편에 이제는 할머니의 사진들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원래도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이신 할아버지는 이제는 할머니 사진 대신에 발코니에 키우시는 식물 들과 놀러 온 새들의 사진을 찍으신다.
랄프 할아버지는 얼마 전 놀란 일이 있었다며 우리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독일의 혼자 사시는 노인 들은 대부분 가지고 계시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침,점심,저녁,밤 시간 맞춰 드셔야 될 약 들이 구분되어 있는 약통 그리고 응급한 상황일때 누르면 바로 병원 응급센터로 연락이 가는 응급 버튼이다.
이 응급 버튼을 시계나 팔찌처럼 차고 계시거나 목걸이처럼 걸고 계신다. 랄프 할아버지는 어느 날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적십자 병원 응급팀 네 명이 문밖에 서 있더란다.
너무 당황하신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세요?"라고 하셨단다.
거기에 급하게 출동된 응급 구조 대원들은 "할아버지 그건 저희가 여쭤 봐야 줘 응급버튼 누르셨잖아요" 하더란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미안해하셨다고 했다.
그날 손목에 차고 있던 응급 버튼이 베란다에 나갔다 들어오시는 길에 어딘가 부딪쳐 눌려졌던 것 같다고 하셨다.
랄프 할아버지는 "내가 가끔 통풍 때문에 다리 아픈 거 말고는 멀쩡 한데 문앞에 응급 구조대원 들이 떡하니 서 있어서 너무 미안하고 당황했어요!" 라며 해맑게 웃으셨다.
바쁜 사람들 미안하게 한 해프닝이었지만 진짜 응급 상황이 아니여서 다행이다 싶어 함께 웃었다.
네 분의 왕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 90 넘은 장수 만세 네 분의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분 은 첫째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밝으시고 긍정적인 분들이시다. 둘째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취미가 있으셨고 셋째 자주 만나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가족이던 친구들이든 간에 근처에 계셨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세가지가 그분들의 장수 비결중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집으로 가는 길 해가 뉘엿뉘엿 아름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