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 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날도 별다를 것이 없는 오전 진료 시간이었다.
다른 날과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한여름 날씨가 지속되어 아침부터 무더위 속에서 온도가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 정도 되겠다.
끊임없이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와 병원 초인종이 동시에 울려 대고 있었다.
다른 직원이 병원 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 손으로 병원 전화를 받고 하던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른 한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기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한 환자가 진료 예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환자의 생년월일과 성함을 물었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에 바로 환자의 진료 기록이 떴다. COPD에 당뇨도 있고 체중도 있는 환자였다.
COPD 라 하면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말한다.
주로 오랜 세월 흡연을 한 환자들 에게서 나타나는 질환인데 잦은 기침과 호흡이 원할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 환자의 호흡 소리가 왠지 신경이 쓰였다.
그 환자는 이번 주나 다음 주에 진료예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환자분 특별한 증상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숨도 더 잘 안 쉬어지고 몸이 힘드네요"라고 했다.
기록을 훑던 눈을 멈추고 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 환자 말마따나 요즘 더워도 너무 더웠다 보통 사람에게도 혈액순환 장애가 올만 하다 거기다 폐질환을 앓고 있다 호흡이 가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어쩐지 촉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병원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그 호흡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촉은 어쩌면 폐질환 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 주 목요일 10시로 진료 예약을 하려다 망설임 없이 "환자분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라고 했다.
다음 주나 진료 예약이 되지 않을까? 했던 환자는 의외라는 목소리로
"지금이요? 자동차가 없는데요 바로는 못 가는데.."라고 했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그러나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환자분 잘 들으세요 지금 바로 택시 타고 오세요. 지금 바로요!"
환자의 알았다는 소리와 함께 나는 직원들에게 헤라클레스를 예고했다.
헤라클레스 ,응급상황
헤라클레스는 우리 동네의 자랑 중에 하나인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추우나 더우나 헐벗고 있는 동상 아저씨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는 그 아저씨의 이름을 응급상황일 때 우리끼리의 암호로 사용한다.
작은 동네 병원이라 무슨 응급한 상황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응급이 터진다.
조용하고 평온한 시골 동네에서도 언제든 사건사고는 터질 수 있듯이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환자가 병원 앞에서 쓰러져서 길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며 응급차로 옮기고 응급차가 흔들리도록 응급처치를 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채혈하는 도중에 환자가 뒤로 넘어가서 응급상황이 발생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멀쩡히 걸어 들어온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가자마자 정신 발작을 일으켜 경찰차와 응급차가 동시에 병원으로 오기도 했다.
그렇게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봄직한 종합병원 응급실 장면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동네 병원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그럴 때 의료진이 응급 터졌다며 흥분을 하거나 당황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끼리는 응급이라는 단어를 되도록 말하지 않고 조용히 헤라클레스 라고 한다.
환자가 병원으로 오는 동안 우리는 초음파실에 심전도 기기를 옮겨다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환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강검진 등 일반 진료 환자에게 보다 차분한 어조로 오늘 진료가 조금 더디게 진행될 수 있음을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심전도와 초음파 검사 그리고 트로포닌 Troponin 테스트 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역시나 모든 검사가 심장마비를 가리키고 있었다.
트로포닌 테스트는 작은 양의 혈액으로 심장마비를 확인하는 간단한 검사를 말한다.
우리는 빠르게 112 (한국은 119 독일은 112다) 응급 요청 전화를 하는 동시에 환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환자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지금 병원으로 엠블런스가 들어올 예정이니 혹시 병원 앞 주차장에 주차한 분들은 차를 갓길로 빼 달라고 당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그제야 차를 빼 달라고 하면 모두가 당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응급차는 몇 분 만에 병원으로 도착하기 때문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삐뽀 삐뽀 소리를 내며 구조대원들이 환자를 이송할 응급차와 응급의가 타고 온 응급차 두대가 우리 병원 앞 주차장과 길 건너로 주차되었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이고
병원 일 3년이면 없던 촉도 생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응급팀과 응급의 에게 검사 결과들을 넘기고 환자 또한 인수인계를 하고는 빠르게 응급이송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건너갈 서류들과 동시에 종합병원 응급센터에서 카테터 등의 준비를 미리 해 둘 수 있도록 발빠르게 연락을 취해 두었다.
골든 타임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환자는 건장한 응급 구조요원 두 명과 응급의 두 명으로 나뉘어 온 응급팀이 간신히 응급 배트로 옮겨 응급차에 태우고 종합병원 으로 이송했다.
두대의 응급차가 삐뽀 삐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려 대며 병원을 빠져나가고도 한참 동안 병원 안팎은 술렁거렸다.
사이렌 소리에 대기실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던 환자들도 처방전, 소견서 등을 맡기거나 찾아가기 위해 병원에 들른 환자들도 동네 주민들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환자의 상황을 "지금 이게 뭔일이냐면유 궁금 하쥬?"하며 시골 부녀회장이 동네 일 떠들어 대듯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는 빨리 화제를 돌리는 것이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병원 입원 여름휴가는요..."로 시작하는 멘트를 쏘아 댔다.
환자들은 어느새 삐뽀 삐뽀는 잊은 듯 달력이 붙어있는 수첩을 꺼내 들고 또는 핸디를 켜고 날짜를 확인하기 바빴다.
며칠 후 그 환자가 종합병원에서 퇴원하고 다시 병원으로 왔다.그모습을 보니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 졌다.
심장마비가 오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몸속 어딘가에 혈관이 막히는 경우다.
그것도 혈관이 어느 정도 막혔는지 에 따라 경중이 나뉘는데 그 환자는 그날 거의 백 프로 막힌 혈관 때문에 비롯된 심장마비였다고 했다.
만약 그날 내가 그 환자에게 다음 주 목요일에 진료 예약을 해 주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니 상상 만으로도 아찔 해 왔다.
물론 소 발에 쥐잡기로 어쩌다 맞아떨어진 케이스 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병원에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그냥은 아니였던가 보다.
시간은 흘러 가고만 있었던게 아니였다.
왜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고...
그리고 요샛말로는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병원 일 3년 차면 없던 촉도 생긴다 인가?
어쨌거나 다행이다 천만다행이다 를 되뇌며 가슴을 쓸어내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