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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Oct 13. 2022

뒤끝 만리장성과 곰의 탈을 쓴 여우


사람들 중에는 체격이나 목소리가 크거나 또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왠지 화통한 성격일 것 같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은 세심한 스타일이라 기분 나쁘거나 속상한 것을 꿍하게 쌓아 두고 때 되면 꺼내 보고 훑어보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이목구비는 오종종 하나 떡 벌어진 체격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크다 특히나 웃음소리가 우렁 차다 보니 사람들이 자주 착각을 하고는 한다.

이 사람 쿨한가 봐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게도 뒤끝이 작렬인 사람이다.

놀라운 것은 갱년기라 깜박깜박하는 건망증과 절친인 것이 무색하게 캐캐 묶은 일들도 때에 따라 시시콜콜 기억해 내고는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뒤끝이 만리장성이다.


남편이 가끔 묻고는 한다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냐?"라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다. 나는 주로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상황들을 기억할 뿐이다.

그때 지나갔던 길 이라던가 건물 같은 장소 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 중에 언제였던가? 낮이었나? 밤이었나? 하는 시간..

그런 디테일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남편은 이십 년 전에 지나갔던 길도 기억하는데 나는 어제 지나온 길도 오늘 가면 새롭다.


바꿔 말하면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일에 대해 서만 잘 잊지 못하는 성격인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 나의 뒤끝 작렬을 정성스레 자극하며 만리장성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정립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우리 병원에 새로 들어온 수습직원 GL이다.


사람들 중에는 처음 보았을 때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도 있고 딱 봤을 때 이렇지 않을까? 했는데 겪어보니 역시나 그렇네 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병원 직원 B는 첫인상은 너무 소심해 보여서 다양한 사람들과 별의별 일 다 만나게 되는 작은 병원일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겪고 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붙임성 있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조금 특별한 환자들과도 다른 직원들보다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았다.


또 직원 GG는 보기에는 당차고 다부지게 생겼는데 마음이 너무 여려서 거절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다.

어느 환자를 여러 가지 검사 때문에 큰 병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 환자분이 그 병원의 위치를 잘 모르겠다 하시고 모셔다 드릴 가족도 없다고 하니 GG는 결국 점심시간에 그 환자분을 종합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고 왔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터줏대감 알테하제 CB 일명 씨불 이는 보기에도 고집스럽고 감정 기복이 있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고집 불통이다. 그래서 간간이 나와 티격태격했었다.


그리고 JH 나는 보기에는 뭐든 오냐오냐 해주게 생겼는데 칼 같은 면이 많고 사람들과 극한 상황의 일을 자주 접 하다 보니 나도 모르던 본성이 슬슬 기여 나오고 있다.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쪼존하고 성격이 급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한마디로 쪼매 피곤한 스타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직원 넷이서 지지고 볶으며 우리 병원을 몇 년째 함께 지켜 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우 같은 우리 병원 의료팀에 딱 보기 에는 곰 같아 보이는데 하는 건 천상 여우 같은 수습 GL 이 합류했다.

GL 을 처음 봤을 때의 첫인상은 곰 같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말투나 행동도 느리고 뚱 하니 시키는 일만 더디게 해낼 것 같은 스타일.

그녀는 원래 동료 병원에서 실습생으로 일했는데 그 동료 병원 의사가 추천해 줘서 우리 병원에 오게 되었다.

동료 의사는 말했다 GL은 병가도 내지 않고 성실하다고 말이다.

독일에서는 아픈 걸 참고 일한 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병원에서 병가를 써 주다 보면 진짜 너무 한다 싶을 만큼 사람들은 조금만 아파도 뻑하면 병가를 낸다.

그런데 병가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워낙 건강하거나 책임감과 성실함이 보기 드문 사람일 게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우리처럼 작은 병원은 일 잘하는 사람보다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줄 성실한 사람이 필요하다.

성실해서 우리 병원에 딱 맞을 것이라고 소개받은 GL은  웬걸 우리 병원 에서는 지각도 자주 하고 조퇴도 병가도 자주 내고 있다.

그 병원에서는 그렇게 성실했다던데..

어쩐지 속은 기분도 들고 우리가 폭탄 처리반이야 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병가를 낸 날들이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나머지 날은 열심히 해야 할 것 아닌가?

느린 것이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다른 사람 열 가지 일할 때 두 가지 일 끝낼까 말까 였다.

자기 페이스라는 것이 있으니 조금 느리 더라도 일을 제대로 끝내기만 한다면야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그 두 가지도 자기가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요 핑계 조 핑계하며 질질 끌던 일을 그녀는 결국 직원 B에게 징징 거리며 부탁해서 B가 대신 끝냈다.

몇 장 되지 않던 그 서류는 고난도의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마다 다른 일로 바빴다던 그녀는 결국 자기 일을 다른 직원에게 떠 넘긴 것이다. 곰의 탈을 쓴 여우였다.

다른 일? 무슨 일? 핸드폰으로 남친 이랑 문자질? 아님 커피 마시는 거?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걸 마빡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꿀꺽 삼키려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저런 걸 위해서 돌아 서면 한 달인데 매달 따박 따박 월급통장에 꽂아 줘야 하나?부터 우리는 왜 지지리도 직원 복? 이 없나?( 데쟈뷰 처럼 예전에 비슷했던 직원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들은 괜찮은 직원을 도대체 어디서 대려 오나? 까지 정말 속이 말이 아녔다.


그런데 밉다 밉다 하면 더 양양이라고 안 그래도 마땅치 않은데 오후 진료 마치고 GL이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말했다.

"제가 화요일 점심시간에 보니까 청소 아주머니 청소 제대로 안 하시더라고요. 쓰레기통 몇 개 대충 비우고 바닥도 대강 닦고 가시던데요. 쓰레기통 하나는 우리가 새 봉투 다시 씌웠어요! 제가 한마디 할까요?"


나는 속으로 놀고 있네~! 너나 잘하세요 싶었지만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분이 지난번부터 어깨가 좋지 않다고 하시던데 내가 확인해 보고 보강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죠. 이유도 묻지 않고 무조건 왜 제대로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뒤치다꺼리하게 하냐 물을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순간 곰의 탈이 벗겨지고 여우 같은 GL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눈치를 챈 거다 그 말속에 자신을 향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오늘도 가을길을 벗 삼아 산책하며 스트레스를 낙엽과 함께 길에 흩뿌리며 간절히 기도 한다.

"저 곰의 탈을 쓴 여우의 찐 모습을 만나게 될지라도 오늘은 빡치지 않게 하옵시고 월급 계좌이체하는 날 손 떨리지 않게 하시고 그나마 저딴 거라도 하나 더 있으니 내가 병원에서 커피 마실 시간도 있다 라며 릴랙스 하게 하옵시며 매사 감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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