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Mar 14. 2023

독일에서 늦어도 괜찮은 것

늦었지만 괜찮아


꽃피고 새 우는 춘삼월인데 비 오다 눈발 날 리다를 반복하는 독일 날씨는 아직 겨울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계절과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겨우내 말라 있던 갈색의 나무들 사이에 하나둘 야생 봄꽃이 피어나고 우리 집 꽃밭에 튤립 잎사귀들이 고개를 내민다.

새집 단장을 하는지 물오른 나무 사이를 오가는 새들의 지저귐이 마냥 바쁘다.

조만간 피어날 꽃봉오리 품은 가지들이 살랑이는 봄옷으로 갈아입고 싶게 유혹한다

그러나 아직은 겨울 패딩을 벗을 수 없다. 사실 입자니 덥고 걸어 두자니 춥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봄을 재촉하는 비 인지 겨울과 빨리 이별하고픈 비 인지 올해 유독 비가 많다.

병원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도 비를 안고 있는 먹구름뿐이다.

날씨는 안 좋고 환절기라 감기 환자들은 몰려오고 처리해야 할 서류는 넘쳐 난다.

진료 시간 중간중간 서류에 파묻혀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 문득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거나 놓친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 날 그날이 그랬다


코시국 몇 년간 한국요리강습을 전면 취소 하고 쉬고 있다가 드디어 올해 3월부터 강습을 다시 시작했다.

이제 위드코로나 시대가 되었고 손 놓고 있다가는 영영 감을 잃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병원 일을 하며 강습 준비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십수 년 늘 해오던 일이지만 3년간의 기나긴 쉼은 몸도 마음도 다시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것을 정리하고 차분히 준비하자 다짐을 해도 앞서 가고 있는 마음에 비해 나이 들고? 무거워진 몸은 그 속도를 따라 주지 못했다.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재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며 매주 한국요리 강습을 준비했다

혹시 이번주 강습 준비에 내가 뭔가를 놓친 것이 있나? 싶어 커피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럼 뭘까? 뭔가를 놓친 것 같은 요 얄딱구리한 감정 말이다.


예전에는 조금만 생각하면 떠오르던 것들도 갱년기의 머리는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고 인터넷  안되어 계속 버퍼링 걸려 있는 노트북처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어떻게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면 나는 두 가지를 들여다본다.

첫째는 핸드폰 안에 있는 달력, 캘린더에 메모해 둔 것들 그리고 둘째는 핸드폰 안에 사진이다.

보통은 캘린더 안에 꼼꼼히 적어 두는 편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을 때 사진을 찍어 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캘린더를 열어 보아도 뭔가 나오지는 않았다.

포토 갤러리를 하나씩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진들... 그중에 아이들 어릴 적 사진도 몇 장이 뜬다.

무려 8년 전 사진들이다.

이번에 강습 준비를 하며 요리 강습 때면 늘 사용하던 오래된 노트북을 다시 꺼내 들었다.

지금은 너무 느리게 돌아가 사용하지 않지만 그 안에 레시피와 사진들이 대거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꺼내어 수정할 부분은 수정을 하고 수강생들 숫자에 맞춰 인쇄를 했다.

그리고 포토앨범 안에 사진들도 출력을 해서 핸드폰에 저장해 두었다.


그 덕분에 다시 만난 8년 전 사진 속의 막내는 작고 통통하다. 지금은 엄마보다 훨씬 커져 머리 한번 쓰담쓰담하려면 점프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때의 딸내미는 제법 반항기가 담긴 매서운 눈초리의 사춘기 소녀 다.

톡으로 사진을 보내 주니 그런 제모습에 웃긴다고 난리다.

지금 보다 앳된 얼굴에 큰아들은 굵은 웨이브를 준 헤어스타일이다.

그래 봬도 그 시절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던 쿨한 청년의 모습이었던 거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다시는 오지 않을 40대 후반의 젊디 젊은?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간 듯한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반갑고 아련했다.

마치 어딘가 묻어 두고 잊어버렸던 보물을 찾기 라도 한 듯 휑재한 기분이 든 달까?


미소 띠며 사진들을 보고 나니 어? 이거다 하는 게 보였다. 찾았다.

그 뭔가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마치 급해서 화장실 갔는데 휴지가 딱 한 칸 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때처럼 매우 찜찜 함을 선사한 것이 바로 요것이었던 거다.

3월 1일 GL 생일이라고 적어둔 쪽지. 핸드폰에 알람 설정을 해둔다는 게 너무 바빠서 깜빡하고 사진만 찍어둔 쪽지.


GL은 우리 병원에 신입이다. 내 글을 자주 읽고 계시는 울 독자님 들은 이미 알고 계실 여우곰 말이다.

글에도 몇 번 등장했던 그녀는 지난여름부터 병원의 정식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올 3월 1일이 우리 병원에서 맞는 그녀의 첫 생일인데 정신없다 보니 내가 깜빡했던 거다.

이런... 벌써 10일도 넘게 지나 버렸다.


우리는 작은 병원 이어서 직원들이 큰 병원처럼 필요한 일들을 나누어 분담할 수 없다.

누구나 의료 적인 것부터 사무 적인 서류 처리까지 모든 일을 섭렵하고 멀티플로 일해야 한다.

그 점이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해서 큰 병원에서는 이미 없어진 보너스를 지급한다.

그렇다고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여름에는 휴가 보너스 겨울엔 크리스마스 보너스 그리고 생일을 챙겨 준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병원 직원들의 생일 시작은 늘 4월부터였다

그래서 3월을 쉽게 지나쳐 버렸는지 모른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독일에서는 생일 축하를 늦게 해도 된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생일 축하를 꼭 생일날 맞춰서 한다. 아니면 지나서 해야지 1분이라도 미리 축하를 하면 안 된다.

미리 생일 축하를 받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 다는 미신스러운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해서 늦게 축하해 주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다.

한 번은 딸내미 친구 중에 생일 파티를 6개월도 지나서 한다기에 아니 좀 있음 또 생일인데 차라리 2년 합쳐서 하지 뭔 놈의 생일 파티를 몇 개월 차이로 두 번 내리 한다냐? 하며 웃기도 했다.

조금 특별한 경우 이기는 하지만 독일에서는 지나간 생일 축하를 느지막이 불러와도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에코백 하나 들고 병원 문을 나섰다. 우리 병원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 길하나 건너면 상가 건물이 나온다 그 안에는 마트와 빵가게가 있다.

진료 시간에 시장을 가기는 처음이다. 일 하는 시간에 마트에 오니 왠지 놀러 나온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빵가게 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트에 들어가서 꽃다발과 카드 그리고 작은 선물을 담기로 한다.  

봄을 상징하는 나리꽃부터 장미도 튤립도 나와 있다.

예쁜 꽃 화분을 선물하자니 전차를 타고 퇴근하는 그 친구가 들고 가기 힘들 것 같아 작은 꽃다발을 고르기로 한다.


하얀 안개꽃과 흰색 마가렛 그리고 핑크빛 장미와 카네이션 이 예쁘게 담긴 꽃다발 하나를 골라 들었다.

젊은 GL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귀여운 자전거와 풍선이 그려진 생일 카드와 화장품 가게 상품권을 담았다.

마트에 가면 다양한 상품권이 있는데 넷플릭스는 이미 있을 것 같고 옷가게는 취향을 타고 이케아는 왠지 집을 위한 거라 자기만을 위한 선물이 못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여러 회사의 화장품들을 모아서 판매하는 화장품 상점 상품권을 골랐다.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도 행복감을 안겨 주지만 고르는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에코백 안에 전리품들을 살짝 감춰 담고 발걸음 도 가볍게 병원으로 돌아가 스며들듯 들어갔다.

모두 바빠서 내가 살짝 자리를 비웠던 것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진료 시간 끝나고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안겨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하면서도 ‘ 비밀이야 비밀!’ 이라고 이야기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C컵이 부러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