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진 것에 만족하고 매일 즐겁게…
해가 바뀌면서 병원 전담 세무사 사무실을 바꿨다
그 과정을 풀어내려면 사실 이 밤이 새도 부족 하다.(다음번에.. 자세히..)
독일을 혹자는 서류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만큼 이 동네에서는 모든 일에 서류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정리해야 할 서류도 많지만 특히나 병원은 안 그래도 서류가 어마무시한데..
세금 관련은 징글징글하게 많다.
그래서 세무사 없이 혼자 병원 관련 세무회계 일을 끝내는 동료 병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다.
당연히 세무사와 함께 하는데 그렇다고 거기서 다 해주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게 시스템을 비유하자면 이삿짐 센터와 비슷하겠다고 하겠다.
이사의 예를 들어 보자,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은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이사를 할 수도 있다.
이사업체를 통해 포장 이사를 하면 살던 집에서 앞으로 살게 될 집까지 요술램프 지니처럼 그대로 옮겨 주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 주어야 하고 소소한 것을 신경 써야겠지만
이사 당사자는 많은 힘을 덜고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단지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럼 보통 이사 업체만 선정해서 이사를 할 경우 여기서 저기로 무사히 옮기는 것만 한다면..
이사 비용은 절감되지만 이사 당사자가 시간 들여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당분간 고달프기 마련이다
독일에서 세무사 사무실 과의 일도 그렇다. 포장이사처럼 그들에게 몽땅? 맡길 수도 있다
그러면 그쪽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이주에 한번 우리 병원으로
직원을 파견하고 챙겨야 할 서류들을 챙겨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각각 따로 비용이 청구될 것이다
덕분에 요즘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새로운 세무사 사무실에 넘겨줘야 할 때마다 받는 관공서 서류 들과 기타 의료용품 업체, 제약회사 등에서 온 청구서부터 자잘한 영수증까지 세금 정산에 관련된 서류를 구분하고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년도 것들 중에 진행되던 부분들은 예전 세무사 사무실에서 새로운 곳으로 CD로
보내 주어서 무리 없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직 시작하지 못했던 서류들을 새롭게 업데이트된 재무 프로그램으로(세무사 사무실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다르다) 폴더를 만들고 세무사 사무실로 파일을 보내 줘야 한다.
그런데 이 눔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이 내겐 그리 쉽지가 않다.
안 그래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내가 뭐 하려고 했더라? 하고 있는데
옵션도 많은 새로운 필드라니... 대엔쟝
안다 모든 병원 일이 그러했듯 익숙해지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해질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그 덕분에 요즘은 병원에 출근하면 복도 끝쪽에 위치한 내 사무실 안에 틀어 박혀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바쁘다.
그렇다 보니 진료실을 오가는 환자들은 마주칠 때가 많으나 약 처방전 필요해서, 내시경 검사, 엑스레이나 CT, MRI 때문에 소견서, 직장에 낼 병가..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 앞쪽 사무실만 들렀다 가는 환자들은
만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렇게 병원에 들른 환자 들을 병원 앞쪽 사무실 오가다 마주 칠 때면 "어머나 김쌤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라는 인사를 받고는 한다.
그러면 나는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제가 컴퓨터 업무 때문에 제방에서 살아요" 라며 웃고는 한다.
어느 날 아침..,
레나테 할머니를 병원 복도에서 만났다.
그날도 욜라리 컴퓨터 자판 두들기며 마우스로 이리 클릭 저리 클릭 하고 있다가
직원들에게 미리 전달해 두어야 할 내용이 생각나서 병원 앞쪽으로 나오던 중이었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반가이 인사를 하는 레나테 할머니..
나 또한 반가웠지만 잠시, 어떤 인사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할아버지를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배웅하신 할머니는 그 후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
병원 일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드라마 저리 가라 하는 사연들을 접하게 된다.
때로 왜 신은 한 사람에게 이다지도 힘든 시련들을 한꺼번에 주시나 싶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바로 레나테 할머니 같은 경우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바로 암 투병을 해야 하는
할머니.. 그 상황을 잘 아는데 “잘 지내시죠? “라는 통상 적인 안부 인사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덜어 내고 "괜찮으신 거죠?"라고 인사했다.
그런 내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이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품은 얼굴로 답했다.
"괜찮아야지요. 오늘은 이렇게 햇빛이 쏟아지는걸요. 주워진 대로 만족하며 살아야 즐겁죠"
얼핏 들으면 무난한 인사말이지만…
나는 할머니가 애써 담담하게 건넨 인사말을 들으며 아침 출근길에 만난 달이 떠올랐다.
아침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 하늘 위에 뜬 둥그렇고 하얀 달을 만났다.
깜깜 밤중도 아닌 아침 시간에 말이다.
동쪽 하늘에서는 오렌지 빛 해가 떠오르려고 해서 하늘은 마치 파란 하늘색 저고리에 소매 끝동을 단것처럼 분홍 빛으로 접혀 있었다.
그 위에 동그랗게 뜬 하얀 달...
독일은 땅덩이도 넓고 사람들도 크지만 달도 크다.
그저 타이밍 절묘하게 동틀 무렵 낮이고 밤이고 이미 떠 있었을 달을 보았을 뿐..
달은 늘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떠 있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해와 달이 공존하며 나누어지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낮과 밤이 생겨 나고..
어느 때는 반달 또 어느 때는 초승달 그리고 어느 날은 둥근 보름달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달은 애초에 그 모습 그대로 일 것이다.
나는 레나테 할머니의 주워진 대로라는 인사말 속에서 아침에 만난 달이 떠올랐다.
삶 가운데 우리에게 주워진 것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매일 늘 그러했듯 주워졌던 모든 것들은
사실 언제나 각기 소임을 다 하고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 발견하지 못하고 마음에 따라 느끼지 못했을 뿐...
어느새 주워진 대로 만족하며 즐겁게 산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
하얀 달이 되어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