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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Mar 03. 2022

[독후감]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날의 추억에 대한 한 편의 설계도 같은 책

이야기 자체가 건물 설계 도면과 닮아있다. 건물의 모든 면을 도면으로 펼쳐놓은 것처럼, 모든 순간순간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한다. 건축사무소의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더없이 어울리는 문체라고 생각한다. 문체는 매일 입는 옷차림처럼 정답이 없다. 결혼식장에는 멀끔한 정장을, 데이트에는 최대한 깔끔한 옷에 아끼는 향수를, 운동을 할 때는 최대한 간결하고 몸이 편한 옷을 선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이런 도면 같은, 만연체가 TPO에 딱 맞는 옷인 것 같다.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전지적 시점에서 해설해주지는 않는다. 도면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한 번만 더 빗대어 표현하자면, 도면을 보는 건축사무소 신입 직원의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실제 화자도 동일하다) 도면으로 건물을 읽어낼 수는 있겠으나, 그 안에 담긴 의도까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완행열차를 타고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의 책이다. 주변 경치가 급변하는 것도 아니다. 끝없는 초목을 지나며, 이따금 핀 꽃 한 송이에 감명받는 여행 느낌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려 회상하는 것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야기 시점도 과거이긴 하지만, 단어나 행동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왠지 전해지는 것 같다.


화자 본인의 심리는 의도적으로 숨기는 듯하다. 하지만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은연중에 알아채도록 일부러 이야기의 말미에 단초를 하나씩 남기는 것 같다.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심리일까 싶다.


화자의 어투가 덤덤하고 관망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편이기 때문인지, 모든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평면적일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막상 그 아래를 들춰보면 보통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문도 일지 않는 수면 아래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생동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마리코가 결혼 얘기를 하기 전의 그 주말이 이 잔잔한 이야기의 완만한 변곡점인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공적인 일을 처리하고 개인 신변 정리를 하는 듯한 인물들의 주말 계획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런데 막상 마리코가 결혼이라는 단어로 파문을 일으키고 나니, 선생님의 애인과 그 집을 수리하러 간 우치다 씨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떠오른다.
꼿꼿한 철사를 목적에 맞게 휘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큰 곡률을 가지게, 크게 확 휘어야 할 때는 정확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큰 힘으로 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세밀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크게만 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세밀하게, 직선에 가깝지만 매우 세밀하게 휘어져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매우 세밀하게 힘을 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약하면 휘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이 소설이 바로 이런 느낌이다. 매우 세밀하게 꺾여있지만 직선은 아닌 완만한 곡선 같은 이야기. 그럼에도 꺾여야 할 곳은 꺾여있어서 꼭 들어맞는 이야기. 그렇게 격정적이지도, 그렇게 무미건조하지도 않으면서 유려한 이야기. 이야기 내에서 가구의 곡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꼭 전체 이야기를 축소해놓은 느낌이다.


새 이야기, 건축사 이야기, 마을의 역사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이야기 사이의 완충제 혹은 본래 이야기를 덮어주는 가림막 정도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새 이야기와 새 울음소리는 한 이야기가 무르익을 낌새가 보이면 이를 덮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위의 환기 역할을 하려다가 의도적으로 실패한 부분이 인상 깊다. 작가 본인도 의도적으로 이런 장치를 활용하고 있었음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건 본인의 의도라는 점을 당당하게 공표하는 듯하다.


청춘과 노년의 이야기가 병치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불안정한 청춘이 연마되지 않은 원석에 비쳐 난반사되는 듯한 느낌이라면, 본 책은 정성스럽게 닦아낸 손거울에 은은한 아침햇살이 반사되어 정확하게 밝아야 할 부분에만 빛이 도달하는 듯한 느낌이다.


크게 흔들리는 것은 쉽다. 수면에 뜬 돛단배가 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은 쉽지만,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수면에서 배가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이렇게 담담하고 차분한 문체로 이야기가 흘러나가는 것이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는다.


이야기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경합 결과가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 첫 문단 첫 문장에 대뜸 등장한다. 마치 결과를 알고 있던 사람에게 전하듯, 과정이나 사연 등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담백하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가장 힘을 주어 방점을 찍으려고 하는 부분일 테지만, 그 어떤 부분보다 힘이 빠져있다. 건축에 대해 그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건축도 결국에는 건축물 자체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이 중요한 것이라는 무라이 사무소의 철학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결론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흡인력 있게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께 경외심을 보낸다.


문체가 담담하다 보니, 화자를 말해주지 않으면 화자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대부분은 사카나씨 이지만, 시점이 바뀌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단번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서술 시점에 의한 트릭? 효과?를 좋아한다. 이런 서술 시점에 의한 효과는 아무래도 글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영상으로도 물론 동일한 효과를 낼 수는 있겠으나, 이런 류의 장치는 관객에게 최소한의 정보 경로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글만 한 것이 없다.


치기 어린 청춘의 이야기라기엔 등장인물들의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다. 건축사무소의 환경 상 자연스러운 설정이기는 하나, 그랬기 때문에 세 청춘의 이야기가 더 빛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노지에 핀 들꽃이라기보다는 잘 가꿔진 화단에 피어난 초목 같은 청춘의 이야기였다.


본인의 생각을 직접 전하기보다는, 에둘러 남을 통해 전하거나 글을 통해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대화 풍습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수동적이고 간접적인 대화가 많았다. 건축물의 형태와 구성을 보고 무라이 선생님의 의중과 생각을 읽어내는 화자의 행동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무소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도 편지를 대신 낭독하는 형태로 전해진다. 무라이 선생님이 사카나씨와 마리코의 결혼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은 두세 단계를 거쳐 전해진다. 사카나씨는 28세 전에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마리코에게도 자신과 결혼하고 싶은 것인지 그 의중을 묻지 못한다. 사카나씨의 미래는 아이가 없는, 유키코와의 결혼으로 바뀌었다. 마리코의 말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책을 읽고 나면 손에 닿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 같다. 건축, 가구가 이렇게나 우리 인생에 밀접해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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