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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리다 Sep 27. 2024

제 사이즈를 말하라고요?

빅 사이즈가 얼마나 있는지 부터 말해보시죠.





“남도사에 가서 장비부터 삽시다.”



  휴대전화로 몇 번의 터치만으로도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 온라인 쇼핑몰에서 다 주문하는 세상인데 수영 장비를 사러 남대문에 가야 한다고 L은 말했다. L은 나와 다르게 천천히 흐르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건지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막상 수영을 시작하려면 ‘수영복과 수모와 물안경이 필요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 수영복 한 번 사본 적 없는 내가 사이즈를 맞게 살 수 있을까 싶어서 L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가면 무언가 다르겠지.


  당장 그 주 토요일 오전 회현역 5번 출구에서 L을 만났다. 회사 동료를 사무실 근처가 아닌 그 외의 장소에서 따로 만나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황금 같은 주말에. 애인이 있을 때는 주말 오전부터 데이트에 나섰지만 내게 최근 몇 번의 토요일은 늦잠의 날이었다. 단 몇 주였음에도 그 생활에 적응했는지, 이 시간에 외출한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도 느껴졌는데 출구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L을 발견하고는 그 이상한 느낌은 더욱 커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왔어요? 아뇨, 방금 왔어요.”


  5번 출구는 남대문시장의 큰 입구 그 안에 바로 있었다. 시장 안에 있는 지하철역 출입구였다. 6번 게이트라는 커다란 문부터 이미 무언가를 사러 온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붉은빛에 잘 익은 반건시들이 먹음직스럽게 쌓인 채 매대에 나와 있었고, 바람을 타고 짭조름하게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곳에는 칼국수 골목이라는 곳도 보였다.


“이쪽으로 가면 돼요.”


  처음 와본 시장이 신기해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느린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듯이 앞서 걷던 L이 말했다. 북새통인 곳들을 비집고 들어가며 이미 여러 번 숱하게 와 본 적이 있다는 모습으로 L은 나아갔다. 얼마 안 가 수영복이 잔뜩 걸려 들어가는 입구조차 보이지 않는 한 가게 앞에 멈추었다. 많이 낡아 보이는 주황색의 차양 안쪽으로 겨우 보이는 간판에 ‘남도스포츠’라는 큰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살짝 실망스러운 외관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는데, 언제 들어간 건지 매장 안에서 얼른 오라는 L의 목소리가 들렸다.


  틈 없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색상들이 나를 압도했다. 물건이 많아서 좁은 건지, 좁은 곳에 많은 물건을 가져다 놓은 건지 천장부터 바닥까지 빼곡하게 수영복과 각종 장비로 차 있는 매장이었다. 내부 통로에는 두 사람이 겨우 교차해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음에도 이미 먼저 도착한 손님들이 가득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장비들이 수두룩했고 어디서부터 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L이 직원에게 말했다.


“수영 처음 시작하려는 데요. 전부 챙겨주세요.”


  그 시작하려는 풋내기가 누구인지 직원은 단번에 찾아내었고 곧바로 나에게 물었다.


“사이즈 몇?”


  아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수영복 사이즈를 대놓고 묻다니. 심지어 남자 동료까지 있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말을 하나. 나는 얼굴이 붉어졌고 당황스러웠다. 55 혹은 66 정도만 되었어도 바로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 크기는 일반적으로 밖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여자 사이즈가 아닌 비교적 많이 크고 우람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수영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여태 크게 와닿지 않다가 수영복 사이즈를 찾아야 하는 순간 망치를 맞은 것처럼 실감이 났다. 아, 내가 이렇게 뚱뚱한데 과감하게 수영을 한다고 했구나. 무언가에 씌어서 그랬던걸까.


  내가 대답을 계속 머뭇거리자, L은 눈치껏 다른 곳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제야 조그맣게 입을 벌려 개미 같은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


“..88이요...”


  20여 년 전 초등학교 신체검사 날,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은 눈앞에 보이는 숫자를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발육이 빨라 키도 크고 살집도 있던 나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10kg 이상은 더 나갔고 본인보다 크고 무겁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재밌었는지 남자아이들은 일제히 깔깔거리며 나를 놀려 댔다. 학년이 끝날 때까지 내 별명이 고정되어 버렸던 그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 사이즈를 적나라하게 말하는 이 순간, 성인이 되어 까맣게 잊고 살아온 어린 시절 창피했던 감정과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 그 아이가 된 것 같이 움츠러들었다.


  힘겹게 꺼낸 내 숫자에 직원은 정말 별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여성 원피스 수영복 3개를 꺼냈다. 각각 무슨 브랜드고 얼마의 가격인지 바로 설명해 주며 어깨에 올라오는 끈이 X 형태인 것과 U 형태인 것을 보여주고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추천해 주었다. 나는 가장 튀지 않고 무난해 보이는 검은색 바탕에 어깨와 허리에 보라색이 살짝 들어간 원피스 수영복을 골랐다.


“조금 넉넉할 수 있는데 처음이니까, 입다가 바꾸세요.”


  순간 저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했다. 수영복이 넉넉하다니 내 사이즈가 입어도 여유 있는 수영복이라는 건가? 일반적인 여성 의류에서는 큰 사이즈가 잘 없어서 여유는커녕 타이트함을 감수하고 입어야 했다. 곧바로 내가 고른 수영복의 라벨을 보니 ‘XXXL’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수영복의 세상에는 큰 사이즈들이 있구나? 내가 너무 쫄아있었네.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수영복을 고르자 바로 수모를 몇 가지 들고 오셨고, 수경도 색상별로 들고 와서 고르게 해 주었다.


  그때 L이 어디서 분홍색 수영가방을 하나 들고 오더니 여기 담으라고 입구를 벌려 주었다. 무난하게 예뻐 보아는 디자인이라 마음에 들어 그대로 가방을 받아 들었는데 이미 가방 안에 무언가 들어있었다. 파란색 병의 안티포그액.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L이 수영 시작 한 기념으로 하나 선물해 주겠다며 이게 굉장히 요긴하다고 했다.


  장비를 다 구매하고 나와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 혹시나 아까 사이즈를 공개하던 민망한 시간에 내가 보인 행동으로 L과장이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싶어 멋쩍게 운을 띄웠다.


“아까… 수영복 사이즈 물어볼 때 너무 민망하더라고요.”

“그게 왜요?”

“날씬하지 않으니까요. 수영장에는 몸매 좋은 사람 많죠?”


  내 질문에 L은 터무니없이 황당한 말을 들은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 없어요. 다 평범해요.”


  수영장처럼 헐벗는(?) 곳에는 항상 몸매 좋은 사람들만 가득할 것 같았는데 아니라니 완전히 믿기지는 않아도 신기했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기죽지 않고 조금은 당당히 혹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볼 수 있겠다는 용기도 살짝 생겼다.


“그리고, 나는 통통한 사람이 좋던데…”


  물은 적 없이 갑작스레 나온 L의 말로 인해 사이즈 사건으로 민망했던 내 마음에 안도감이 생기면서도, 약속 장소에 도착해 L을 만나 느꼈던 그 묘한 기분이 왜 그랬던 건지 어렴풋이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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