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inem 이야기
다락 위 박스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났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괜히 정리를 한다고 이것 저것 늘어놓는 짓을 하곤 한다.
버릴 것도 아닌데, 괜히 한 번 더 꺼내보고 다시 넣는 짓.
다이어리, 티켓, 빛 바랜 인쇄된 사진들.
그리고 그 안에 섞여 있던 A4용지 한 장.
"형,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 문장은, 팬카페 게시판에서 내가 직접 복사해 저장해 둔 문장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나는 그 게시물을 또렷히 기억한다. 글쓴이의 아이디는 ‘DarkSlim91’. 17살.
어디선가로부터 그의 이름이 Stanley라고 들었지만 그는 보통 Stan으로 약칭되어 불리었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었다.
내 이름은 레이첼이고 30대 중반의 직장인 여성으로 나 역시 디트로이트의 백인빈민가 출신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백인 래퍼 에미넴을 위한 작은 팬카페를 운영했다.
처음엔 단순한 팬이었다.
디트로이트의 화이트 트래시 출신. 폭력과 빈곤 속에서 자란 그가 흑인들만 우글거리는 랩 배틀을 통해 살아남고, 결국 가장 거침없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에미넴은, 나 같은 17세 백인 소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순식간에 차지해버렸다.
그는 광기를 드러내며 공격적인 자아를 표현할 때는 '슬림 세이디'의 가면을 썼다. 자신이 만든 무모하고 쉽게 지치고 불만에 가득찬 페르소나였다. 1997년에 처음으로 등장시켰다가 1999년 최초의 메이저 히트송 'My Name Is'에서는 내면의 분노와 어둠을 쏟아내는 가면이자,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면에 내 세웠다.
슬림은 현실에서 허용되지 않던 분노와 풍자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폭력, 중독, 인종차별, 사회의 위선을 비트는 그의 가사는 때로는 섬뜩했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이었다. 어떤 팬은 에미넴과 슬림 세이디를 구분하지 못했고, 나 역시 헷갈릴 때가 많았다.
당시에 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슬림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와 내 자신이 어느 정도는 유사한 점이 많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아니 오직 내 생각만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집착하는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스탄, 아니 DarkSlim91이 처음 나타난 건,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슬림 세이디를 “형”이라 불렀고, 자기 소개란에 “슬림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 17살”이라 적어놨다. 프로필 사진은 닥터 드레 옆에서 웃고 있는 에미넴의 흑백 컷이었다.
그 애는 착하고 순진하고, 어디서 그런 순수함이 묻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맑았다. 처음엔 그냥 유난한 팬이라 생각했다.
그는 에미넴이 무명일때 불렀던 앨범을 가지고 있다고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했고 에미넴의 삼촌 로니가 자살하자 그를 기억하려고 왼팔에 문신을 새겨놓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에미넴의 가사를 인용하며 댓글을 달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팬카페 게시판에 "형, 오늘도 랩 연습했어요" 같은 글을 올렸다. 나는 가끔 그 애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고, 가끔 댓글도 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가볍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다 그 아이가 점점 이상해짐을 느꼈다.
여자친구랑 싸우면서 "Shady한텐 덤비지 마, 죽일 수도 있어" 같은 가사를 인용했다.
자긴 농담이라고 했다.”
누군가 그걸 지적하자, “넌 진짜 팬이 아니야”라며 대놓고 싸웠다.
매일 에미넴에게 편지를 썼다고 인증했는데, 그 편지를 찢어 다시 쓰고 또 썼다고도 했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글의 분위기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슬림은 왜… 아직도 답장을 안 해줄까요?”
“이 세상에 의미가 없어요.”
“이렇게까지 사랑하는데, 왜 나를 안 봐주죠?”
그의 말은 점점 무거워지고, 뭔가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을 줬다. 어느 날은, 에미넴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글을 수정했다.
"슬림 형, 미안해요. 나 진짜 그럴 뜻은 아니었어요."
그 밑에, 칼날 그림 이모티콘이 여러 개 달려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즈음부터 나는 그 애의 글을 피하기 시작했다. 댓글을 달지 않았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더니 오히려 게시글은 더 자주 올라왔다. 하루에 열 개도 넘는 글이 올라왔다. 날 부르며, 울 듯한 말투로.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애를 확실히 차단하지도, 경고하지도 않았다.
“그땐 나도 애였으니까.”
“댓글을 달지 않으면, 그 애는 더 많이 썼다.”
(Part2 완결로 이어집니다)
에미넴의 주요 곡을 아래 링크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