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늦은 점심, 오아시스를 찾아서
숙소 근처에는 제철재료로 음식을 내놓는 꽤 유명한 음식점이 있었다. 다음날이면 숙소를 옮겨야 했기에
‘오늘은 반드시 점심으로 먹어야겠다!’
굳은 다짐을 하고 웨이팅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숙소를 나섰다.
길을 두어번 건너자 곧 도착한 가게 앞에는 네 분의 할머니가 모여 서서 저마다의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일본어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기분 좋은 식사였다는 것은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할머니들에게 사탕을 건네주러 나온 점원은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연신 친절하게 할머니들의 질문 세례에 답변을 하고 있었다.
흠.
할머니들의 입맛이란 어딜 가나 까다롭기 마련인데.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쪽에 앉는 것이 좋을까 유리문 너머를 흘깃거리며 자리를 스캔하던 중, 점원은 드디어 내 앞에 섰다.
히토리데쓰 -
라 입을 떼려던 찰나 내 눈앞에 보인 것은 그녀의 합장한 손과 정수리였다.
솔드아웃인 것이다.
아직 12시밖에 안 되었는데.. !!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가게 문은 매정히 닫혀버리고 말았다. 할머니들의 유난스러운 칭찬을 본 탓인지
발걸음이 쉽게 떼 지지 않았지만 재료가 없다니 별수 없었다.
나는 굶주린 배를 붙잡고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나도 할머니들에게 뒤지지 않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마음에 처음 마주친 몇 개의 가게를 지나쳐 버렸더니, 한참 동안이나 음식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너무 주택가로 들어선 탓일까. 음식점은커녕 사람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삼십 분 정도 걸었을까?
너무 배가 고파 허리가 휘청이는 것만 같을 때, 눈빛이 이상한 고양이를 보았다. 그 고양이는 스툴 위에 올라서서 도저히 먹어선 안될 것 같은 수프 같은 걸 끓이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 다시 바라보니 위에 kitchen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주황색 양철지붕에 하늘색 창이 난 귀여운 가게였다.
수상한 고양이에 이끌려 들어간 그곳은 카레를 파는 곳이었다.
메뉴판에는 몇 가지 카레가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변덕스러운 카레>였다.
아마도 때에 따라 종류가 바뀌는 카레를 표현한 것 같았다. 아까 그 기묘한 눈빛의 고양이가 끓이던 카레는 분명 변덕스러운 카레일 것이란 확신으로 변덕스러운 카레를 시켰다.
고양이 그림을 직접 그렸다는 사장님은 매울 수 있는데 괜찮냐고 물었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나는 전혀 문제없다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별 것도 없는 상추를 하나 잘게 잘라 만든 것 같은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별생각 없이 조금 집어 입에 넣곤 주변을 구경하다가, 놀란 마음에 고개를 획 돌려 다시 샐러드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뭐 든 것도 없는데 왜 맛있지?
내가 앉은 바 끝쪽 자리에서는 조금만 몸을 돌리면 주방을 볼 수 있었다. 상큼한 샐러드의 맛에 한껏 기대감이 부푼 나는 주방에서 눈이 마주친 사장님께 하이볼 한잔을 부탁했다.
어깨너머로 주방의 분주한 소리가 들리고, 가게 안에는 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온 동네 부부, 그리고 하이볼 한잔에 샐러드를 아껴먹고 있는 나뿐이었다.
곧 <변덕스러운 카레>가 등장했다.
노란색 초록색 주황색이 마치 하와이 요리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일본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카레집을 종종 방문했었지만, 단연코 이제껏 먹어보았던 카레 중 가장 맛있었다.
맛집 웨이팅에 실패하고 주택가를 삼십 분 넘게 걷다가 이런 보물 같은 곳을 발견하다니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자꾸 하이볼을 들이켰다.
점심시간 마지막 손님이었던 내 카레를 만들어내고, 사장님은 주방에서 나와 식사를 마친 부부와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유모차에 탄 아이를 향해 연신 장난을 치며) 이내 주방으로 뛰어들어가 휴대폰을 가지고 나오더니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동네의 작은 식당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그것 다운 맛과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서 나는 가게를 나섰다. 든든히 차오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바라보니 고양이의 미소가 이리 인자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언제든 카레를 준비해 둘게
내 조용한 동네로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