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으로 쓸다가 한 곳에 멈췄다.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코끝에 스미는 유자향, 폐가 얼어붙을 듯한 추위, 붉은 기운을 내뿜는 화목난로. 한 순간에 그런 모든 감각들이 떠오르기에, 어슴푸레한 그 느낌 그대로 숲에 들어가도록 두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내 손에 들어온 건 2018년 12월에 떠났던 남해 여행에서였다. 어느 카페였는지, 그곳은 유자 카스텔라를 직접 만들어 내놓던 곳이었다. 커피 맛이 오롯이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자체로는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유자 카스텔라와 함께 했을 때 빛을 발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단맛과 유자향을 보편적인 취향의 범위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 커피가 맡고 있던 역할인 듯했다. 스스로 빛나진 않아도 중책임에는 틀림없었다.
남해 여행은 남해를 가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라기보다는 서울을 벗어나기 위한 여행에 가까웠다. 당시 나는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매주 돌아오는 주말로도 리프레시가 되지 않아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2018년 12월은 당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 2년 전이었고 그때 나는 갓 주니어를 벗어났을 때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계속되는 경쟁과 평가받는 환경에 지쳐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막연한 걱정들에 대해서는 뭐가 그렇게 걱정되고 힘들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지금도 그러고 있기에)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 마음이 지쳐있었는데, 당시 여자친구인 아내가 남해로의 여행을 제안했다. 나는 딱히 이동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의 제안은 꽤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면 지긋지긋한 서울과의 끈을 끊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한 해를 확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마침표 같은 여행이 될 것 같은 기대감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그 결정은 탁월했다.
겨울철 남해의 모습은 동화 같았다. 그 특유의 처량하고 공허한 분위기는 내가 ‘멈춤’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곳의 밤은 여느 시골의 정경이 그러하듯 예상보다 이르고 깊은 모습으로 맞이했다. 헤드라이트가 무력해질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은 분명 의식이 현실에 있음에도 깊은 명상 속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긴장 가득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시속 20킬로미터도 안 되는 속도로 산비탈을 내려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생각보다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최고급 패딩까지 뚫고 깊게 파고드는 칼바람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그 느낌이 꽤나 생소하고 웃겼는지 우리는 남들에게 공포심을 줄 만큼 낄낄 웃기도 했다. 아마 그때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바람 중 하나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던 만큼 그런 점에서 그때의 남해 여행은 완벽했다고 볼 수 있다.
<노르웨이의 숲>. 이 책은 그런 완벽한 여행 중에 구입한 책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한국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흥행하지 않아 <상실의 시대>로 제목만 변경해서 출판했더니 대박이 났다던 그 책. 내가 그 책을 읽은 건 남해 여행으로부터 2년 뒤 비로소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였다.
어슴푸레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감각적으로 든 느낌은 축축함과 쓸쓸함, 그리고 그 후에 밀려오는 허무함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게 내 마음을 썩 무겁게 만들었다. 주인공 와타나베를 둘러싼 인물들의 연쇄적인 죽음들, 그 가차 없는 허무함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전까지 내게 있어서의 죽음은 삶과는 너무도 ‘이질적’이고, ‘허무’하며,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죽음에 대한 내 인식이 변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여전히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으나 반복되는 노출에 무뎌졌는지 어느새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한 개인의 인식이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순응’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것이었으며, 책을 읽는 얼마 안 되는 그 기간 동안에 그런 심정적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은 놀랍고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한편 소설이 막바지로 치닫는 중에 나온 대화에서 죽음은 다른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이미 삶에 내재된 것’이라는 식의 내용이 나왔는데, 그건 그 시점에 죽음에 대한 변화된 내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역시 작가의 의도된 연출력에 깊은 공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건 여전히 다소 무겁고 우울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연출적 요소로써 묘한 긴장감과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은 없었던 것 같다. (……왜 또 죽니… 그만 좀 죽어!)
삶과 죽음,
나와 너,
살아서 나오코 곁을 지키고 싶은 와타나베와 이미 죽어버린 기즈키를 잊지 못하는 나오코,
생기 넘치게 와타나베에게 다가온 '살아있는 존재' 미도리와 '이미 죽어버린' 나오코,
죽음 그리고 섹스.
이렇게 작중 극명하게 대비되는 요소들이 균형감과 입체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이 작품은 '섹스'에 대한 잦고 상세한 묘사가 특징이기도 하다. 그 묘사가 여느 야동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인데, 때로는 이 책이 소개될 때 외설적인 내용 자체에 어떤 의미를 크게 두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나아가 오히려 불필요하게 남발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 '섹스의 상당하고 잦은 묘사'는 이 소설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 생각됐다. 왜냐하면 섹스는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이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생(生)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상징'이기도 하며, 나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생각해 보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으며 하나 궁금했던 점은 후반부에 나가사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에게 했던 충고였는데,
"와타나베, 자기를 동정하지 마. 스스로를 동정하는 행위는 저속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나가사와는 외무성 시험 합격 축하 기념으로 와타나베 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인 히츠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히츠미에게 와타나베에 관해 몇 가지 언급을 했다.
와타나베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고, 본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입이 무거우며, 나가사와 자신처럼 자기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작중 소위 '천재'로 묘사되는 나가사와는 웬만해선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에게만큼은 곁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다는 나름의 후한 평까지 내린다. 그런 나가사와가 구체적으로 와타나베의 어떤 점을 두고 그런 충고를 했던 건지 궁금했다. 와타나베가 자기를 동정하는 행위는 적어도 나가사와와 '이별'하기 전까지는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거만한' 충고를 했던 나가사와의 '완벽함'을 재물 삼아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여실 없이 드러내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중 히츠미의 죽음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완벽한' 나가사와는 히츠미의 죽음에 관하여 와타나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그동안 굳건하게 지켜온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가사와의 무책임한 중2병이 히츠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했던 와타나베가 더이상 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여기서도 죽음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절대 우울한 소설이 아니다. 여전히 희망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먼저 세렝게티 초원에 지금 막 태어난 새끼 기린을 연상하게 하는 레이코, 그녀가 결국 요양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왔다는 점, 주인공 와타나베가 마지막에 미도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도리, 너와 함께 하고 싶어'라고 말했던 점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즉 '삶의 세계'-에서 살아가겠다는 와타나베의 처절한 의지를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지금 어디냐는 미도리의 물음에 와타나베의 '내가 지금 어디지?'라고 하는 독백 장면은 레이코와 같은 모습의, 새로운 삶의 탄생 내지는 새로운 시작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 소설은 희망을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사실 이 소설이 내가 사는 현실까지 무겁게 만드는 책이라고 느껴져서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으나, 막상 소설을 돌이켜 내가 느낀 바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희망'으로 감상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결국 스스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들어 안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