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주는 세기의 사랑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기다니.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은 그냥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와 나를 쳐다볼 때의 눈빛은 확연히 달랐다. 혹여 눈 앞에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 누가 옆에서 유혹하든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씨익 웃는다. 심장이 녹아내리는 느낌. 세상에 내가 전부인양 온몸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기는 기분은 생각보다 엄청 좋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서로를 사랑한 건 아니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랑하기 시작했으니 내가 먼저 사랑에 빠진 걸 수도 있지만, 그건 사랑이라 부르기 부족하다. 그땐 어찌 보면 실체 없는 사랑이었다.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존재가 느껴지긴 하지만, 사실 이 아이가 다른 아이로 바뀌어 꼬물 거리고 있었더라도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한다고 했을 것 같다.
아이가 처음 세상에 나와 내 품에 안겼을 때도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감격스러움에 더 가까웠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는데 누가 내 아인지 모르는 상태랄까. 간호사가 이 아이가 내 아이라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신생아실에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찾아보세요 했으면 못 찾아냈을 거다. 혹여 아이가 바뀌어서 다른 아이를 내 아이라고 했다면 내 사랑의 대상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아이와 사랑에 빠지는 건 생각보다 연인 사이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비슷했다. 남녀 사이가 아니라 원래 사랑에 빠지는 원리가 그런 걸까. 모성애는 본능이라지만, 처음부터 이런 깊은 사랑이 뚝딱 생기진 않았다. 아이를 낳자마자는 얼떨떨한 느낌이 더 강했다. 내 아이라는데 영 어색하다. 마치 옛날옛적에 얼굴도 모르고 시집 장가가던 시절, 오늘부터 이 사람이 네 남편이다 하면 남편이구나 하는 느낌 같았다.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내가 엄만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목소리가 익숙한 존재, 젖 냄새가 나는 존재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이에겐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됐었다. 그저 안아주고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줄 누군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보다 신생아실 선생님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시작은 의외로 모성애가 아니라 아이의 사랑이었다. 내가 모성애라는 본능으로 아이를 사랑하기 전에 아이가 먼저 내게 사랑을 주었다. 나를 계속해서 찾고 얼굴만 봐도 웃으며 나를 사랑해줬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조건 없이 많이 웃어준 적이 있었을까. 내가 특별히 무언갈 하지 않아도 그저 나라는 존재 그 하나만으로 아이는 참 행복해했다. 이런 사랑을 하루 종일 온몸으로 받는데,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아이와 나의 사랑은 이렇게 상호작용하며 점점 더 커지고 깊어졌다.
아마 나는 이때 받은 사랑의 기억으로 평생 이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내리사랑이라는데, 사실 아이가 준 사랑에서 시작된 관계를 아이가 독립해 나가서도 나 혼자 계속 이어가는 것 같다. 내리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이는 커가면서 이토록 사랑해줬던 기억을 잃어가겠지만, 난 평생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인을 끝까지 사랑하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 아마 나도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엄마를 사랑했었겠지. 점점 내 인생에서 엄마의 순위는 밀려났지만, 엄마는 여전히 내가 1순위인 게 조금씩 이해된다.
요새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볼과 이마, 발바닥, 손 등 온몸에 하루 종일 뽀뽀를 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조금 더 크면 귀찮다고 하지 말라고 하겠지 아쉬움이 든다. 어릴 적 나도 엄마가 손 잡고 자려는 걸 귀찮다고 뿌리치고, 그럼 발만 잡고 자겠다는 걸 인심 쓰듯 그러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이의 세상이 커갈수록 그 안에 내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 텐데, 상실감을 느끼진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계속 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더 걱정이지만 말이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모성애가 엄마만이 갖는 특별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니 모성애는 아이와 상호작용 속에 발생하는 사랑이다. 다만 이런 세기의 사랑을 엄마가 아니고서야 받기 힘들 뿐. 굳이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혹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내 존재 자체를 모두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디 쉽나. 육체적으로는 힘들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워진다. 이래서 육아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지옥이라고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