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얼만이 미덕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신만만’ 해 보인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무엇이 자신만만한지 몰랐다. 겸손을 떨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내세울 것도 없었고 자신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나를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자신 없는 것도 없었다.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말하면 그뿐, 잘하는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당당함과는 별개로 거울 속 내 얼굴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얼굴은 크고 눈은 작았다. 눈 화장에 익숙했을 즈음에 아이섀도로 눈에 음영을 넣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로 강조하면 이전과는 다른 얼굴이 되었다. 한층 깊어지고 뚜렷해진 눈은 작은 눈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문제는 화장을 지울 때였다. 정성을 들인 화장일수록 화장 전, 후의 차이는 크게 다가왔다. 화장을 지우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같은 눈이 되었다. 화장으로 꾸며서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화장을 지운 내 모습 중 어떤 것이 진짜 내 모습인지, 어쩐지 누군가를 속이는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이 있었다.
프사에 올려둔 보정 사진을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할 때 느끼는 부담감에는 그런 찜찜함이 섞여있었다.
이런 마음은 생얼 미인들로 인해 더 깊어진다. 막 자다가 일어난 아침 사진을 올리며 민낯의 예쁨을 드러낸다. 화장해서 예쁜 것은 민낯의 예쁨에 비해 어쩐지 덜 당당한 것 같다. 왜 그럴까? 민낯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 안 한 모습이 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맞는 생각일까? 언젠가 수영 레슨이 끝난 후 회식을 한 적이 있다. 다들 옷 입으니 못 알아보겠다고 서로를 보며 놀라워했다. 화장하고 옷을 입으니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개성을 가진 완벽한 개별자로 보였다.
중국 경극 배우는 화장을 진하게 했을 때 그 정체성이 드러난다. 스트리터 파이터 우먼들도 화장을 하고 옷을 입었을 때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의 정체성은 벗고 꾸미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꾸미고 화장을 했을 때 드러난다.
화장을 지운 모습과 화장한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화장한 모습도 나고 화장을 지운 모습도 나다. 화장으로 깊고 커 보이는 눈도 내 눈이고 지워서 작고 희미한 눈도 내 눈이다. 수영복을 입은 모습도 나고 차려입은 모습도 나다. 민낯만이 진짜가 아니다. 꾸미고 한껏 치장을 해서 아름답다면 그것도 나이다. 꾸미고 가꾸는 일은 스스로를 격려하는 삶의 기술이다. 화장은 외모는 물론 기분까지 바꿔 놓는다. 자신을 꾸미고 스스로 근사하다고 느낄 때 삶은 고양된다.
정체성은 날 것 그대로를 말하거나 정해진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윈도에 전시된 완벽해 보이는 마네킹의 옷발도 뒤에서 옷핀으로 고정하여 연출한 것이다.
그러니 내 안의 최선의 모습을 끄집어내고 연출하는 일에 당당해지자. 생얼만이 미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