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교에 들러 연말정산을 마치고 어슬렁어슬렁 길을 나선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걸어볼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옮긴다.
걷다 보니 익숙한 동네에 당도했다. 신혼집이 있던 동네다. 자주 가던 유명한 떡볶이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군. 그 사이 새로 생긴 카페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하기야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눈에 익숙한 풍경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신기할만한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막 어른이 된 듯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우리는 아무런 간섭 없이, 눈치 볼 필요 없이, 잔소리 들을 필요 없이 자유를 누리느라 신이 났던 것 같다. 늦은 시간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심야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놀다가 다음 날 아침에 알람을 못 듣고 지각을 한 적도 있었지. 마음껏 놀기 위해 결혼을 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신나게 놀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퇴근 후 우렁 각시처럼 우리 집에 오셔서 집안일을 말끔히 끝내 놓은 엄마를 만나면 아이처럼 반갑게 엄마를 불렀더랬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라 요리를 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하기도 했었다.
집안일이라곤 해 본 적 없던 내가 집안일이 얼마나 서툴렀는지, 어느 날은 가스점검을 나오신 아주머니께서 내가 칼질하는 것을 보시고 두 팔 걷고 시범을 보이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참 귀여웠던 시절이다.
새로 생긴 카페 1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7년 전과 별로 변함없는 풍경이 내다보인다. 하나하나 선을 그으며 추억에 잠긴다. 수없이 지나다녔던 길을 정성껏 그림으로 담아낸다. 사소한 풍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마트 앞에 쌓인 물건들이 무엇인지, 빛바랜 간판은 몇 년이나 된 것인지, 전선이 어디에 매어 있는지, 어느 가게가 비어 있는지, 간판 색깔이 서로 어떻게 어울리는지, 트럭에는 어떤 물건이 실려 있는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엿보며 그림을 완성한다.
포인트가 되는 색깔이 있는 그림을 좋아하는데, 오늘 그림이 그렇다. 내 마음에 꽤 드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서비스로 주신 쿠키가 달콤함을 더한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일몰이 화려하게 내려앉는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