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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겪고 싶지 않은 것이나
그 마저도 경험이 되어
삶을 풍부하게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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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수술과 계속되는 항암치료에 지친 어느 날, 그러니까 내 삶을 통틀어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가장 컸던 순간에 썼던 일기의 한 토막이다.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깜깜한 순간들은 내게 극한의 정신적 고통을 안겼으며, 매주 진행되는 항암치료는 나의 육체를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고통이 왜 내게 찾아온 것인지에 대한 원망으로 나 자신을 어찌하지 못한 적도, 진통제를 왜 이리 늦게 주냐며 의료진에게 짜증을 낸 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가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고통스러운 경험마저도 내 삶을 풍부하게 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운 좋게 살아있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백혈구 수치도 정상 범위에 근접해 있고, 암세포들도 잠잠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닌 ‘느낌’이다. 내게 영향을 주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며 내 마음이 평안을 향해 갈지 고통을 향해 갈지 역시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평안을 택해야 할까?
사회의 부조리 앞에, 정의롭지 않은 현실 앞에서 마저도 고통스럽지 않고 평안한 것이 과연 내가 바라는 삶일까?
나만이 느끼는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대체로 평안을 택하고 싶다. 하지만, 걱정과 고민을 동반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순간은 반드시 있으며 신체적 고통 역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통이 신체의 통증이나 부정적 감정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이어져 나갈 변화에 있다. 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 덕분에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는 삶으로 변화된 것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고뇌와 변화를 위한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찾아올 고통과 마주할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이어질 변화를 기대하며 정면으로 상대할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좋은 일이 꼭 좋은 결과를 일으키지 않으며, 나쁜 일이 반드시 나쁜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면서 배워가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으며 내게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할 수는 없겠으나, 그 고통을 상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배워가는 중이다. 고통을 포함하여 앞으로 내게 올 많은 것들이 나와 내 주변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도록 살아가겠다.
기본학교 2기를 지원하며 제출했던 '고통'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 문제, 해결책은 모두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그래서 기록한다. 다시 읽고 그 사이에 얻은 경험과 생각을 보태어 간다.
새로운 삶이 주어지기만 하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잦아들고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며 다시, 고통도 찾아온다. 살만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여 반가운 마음도 있다. 다만, 그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좀 더 나아지고, 그 고통이 나와 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