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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Nov 21. 2019

민비에 대한 오해

_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샅샅이 파해쳐 보는 거라 흥미진진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내 성향과도 맞았다. 나는 원래 내 신념을 강화시켜줄 만한 책을 골라서 읽는 편인데, 그런 의미에서 내 가치관을 잘 설명하는 책이다.



근대를 다루다 보니 사료도 전부 근대의 작품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대계몽기(개화기)의 글이 많다.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이름만 들어봤던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의 글을 읽어보는 맛이 있다. 지금과는 표기법이나 맞춤법이 다르다.


대학교 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내용이 기억 안나서 다시 펼쳐보았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총 3장으로 나눠서 이야기하는데, 목차는 아래와 같다.


제1장 민족 또는 새로운 초월자의 출현

제2장 여성은 어떻게 국민이 되었나

제3장 병리학과 기독교 - 근대적 신체의 탄생


먼저 1장, 민족과 관련한 글 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민족이라고 하면, 고조선부터 내려온 개념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근대계몽기에 수입된 개념이다. 잔혹한 일제 통치를 견디기 위한 갑옷이었다.


개인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다보면 개인주의는 그 반대에 위치하게 된다. 개인의 문제라거나 개인간의 차이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민족에 해를 끼치는 행위로 여겨진다.


... 이 시대는 일개인의 주의로 살기를 구하는 것은 도저히 되지 못할 시대가 아닌가 하물며 오늘날 한국은 풍우가 회명하고 마귀가 횡행하여 민족의 쇠망함이 눈 한 번 깜짝일 동안에 있나니 이 날이 과연 어떻게 급급한 날인가. ... 동포의 경우가 이렇게 비참하게 됨은 무삼 일인가 그 까닭이 많으나 개인주의가 제일 큰지라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의 비참한 현상을 지은자도 곧 개인주의라 할 것이며 ...
 _대한매일신보 「자기 일신을 위하여 살기를 구하지 말지어다」 1909-11-21 논설


혈통


민족이라는 상상의 개념을 강조하려다 보니, 신화를 꾸며낸다. 단군으로부터 오랜기간 이어져온 단일민족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렇다.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신화는 단군이 아니라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다.


근대계몽기의 신문을 보면, 이 신화를 억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다.


... 이렇게 하면 인종이 자연 번성할 것이어늘 이제 이렇게 인종의 번성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멀리 다른 나라와 통혼하는 것으로 구하고저 하니 또한 그르도다 그 더욱 놀랄 자는 청국과 일본과 서국에 유학하는 자와 혹 가서 사는 자 흔히 외국 계집을 다리고 있는 자 많으니, 오호라 외국계집을 취하는 날은 곧 애국심을 죽이는 날이라 하노라
 _대한매일신보 「내외국인의 통혼을 금할 일」 1909-01-10 논설


위 글을 보면 유학하는 것도 외국에 사는 것도 매국으로 묘사한다. 당시에는 인종과 민족을 거의 동일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민족적 가치를 위해서 순순한 혈통을 유지해야 했다.


우리 나라의 땅을 차지했던 종족이면 그들이 어떤 종족인 것도 묻지 않고 모두 우리의 조상으로 인정하며, 우리 나라의 토지를 관할했던 종족이면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이를 모두 우리 나라의 역사에 넣고 있으니 그 어리석음이 어찌 이와 같은가
 _신채호 「독사신론」


신채호 역시 혈통주의에 갇혀 있다.


민비


민족주의 관점에서 갖는 가장 큰 오해가 바로 민비다. 「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이 흥행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 이미지는 나라를 지키다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장렬히 전사한 조선의 국모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민비와 친척들은 전형적인 부패권력이었다. 게다가 위로부터의 개혁이 절실했던 시기를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다.


어찌보면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 곧 1894년에서 1905년까지 약 10년 동안은 열강들의 힘의 공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외세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더라면 조선은 위로부터의 혁명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적대적 긴장을 활용하기보다 러시아에 완전 밀착함으로써 개혁의 기회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만 낳고 만 셈이다. 민비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해되었다.
 _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일본과 반대되면 애국'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만들어진 오해다.


2장과 3장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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