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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Feb 05. 2020

동정과 분노

 「뉴필로소퍼 1호 _너무 많은 접속의 시대」

이 잡지도 벌써 3번째 읽는 거라 이제 노하우가 생겼다. 철학 잡지인데, 의미없는 글 1/3, 재미없는 글 1/3, 그리고 머리를 딱 때리는 글 1/3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미없고 재미없는 부분은 슬렁슬렁 넘겼다. 이번호의 주제는 접속이다. 이와 관련해서 수많은 필자들이 글을 썼다. 좋았던 부분만 간단히 소개한다.



추억


「대리사회」로 유명한 김민섭이 글을 썼다. 과거의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항상 느끼지만 한국 필자들의 글이 더 공감이 간다.


1980년대, 다이얼 방식의 전화기에는 각각의 숫자마다 동그란 홈이 있었다. 거기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면 숫자가 입력됐다. 1을 누를 때는 한 칸만 움직이면 되었고 9를 누를 때면 9칸을 움직여야 했다. 숫자 9만큼 풀려 나가는 그 '차라락' 하는 소리가 참 좋았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개인 휴대폰이 없던 때니까, 초등학생인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받는 쪽은 대개 그들의 부모님이었다. 그러면 "저는 ㅇㅇ이 친구 민섭인데요, ㅇㅇ이 있으면 바꿔 주실 수 있나요?"하고 물어야 했다. (이 시기에는 전화 예절이 무척 중요했다.) 그러면 그들은 "ㅇㅇ이 공부한다. 무슨 일로 전화했니? ㅇㅇ이랑 많이 친하니?"하고, 나에게 많은 것을 되물었다.


속도


데이터의 양도 많아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편지를 보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엄청나다.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 달라지면서 우리도 변했다. 느린 건 못 참는다.


편지로 주고받는 대화 속도는 몇 주나 며칠 단위로 측정되는 반면, 전자매체를 이용한 대화 속도는 몇 분이나 몇 초 단위로 측정된다.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의 지상 목표인 짧은 대기 시간이 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최고의 이상이 되었다. 온라인 행위를 연구한 결과, 네트워크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정보 교환이나 제공에 있어 잠시 잠깐의 지연 상태도 참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네트워크 공학은 인간 감성 공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정


외부세계의 소식도 이제 쉽게 접한다. 특히 유튜브. 소식을 접했을 때, 분노를 느낄 수도 동정을 느낄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으로 유명한 수전 손택은 동정심을 비판한다. 응? 동정심은 착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결국 수긍했다.


손택은 동정심을 믿지 못할 감정이라고 본다. 동정심을 끌어내는 영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저 고난을 일으킨 원인의 공범이 아니야. 우리가 동정심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을뿐더러 결백하다는 표시야"라고 여기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정심은 분노와 대비된다. 분노는 책임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집중


광고를 시청하면 무료로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우리의 주의력을 돈 받고 팔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주의력을 빼앗기지 않고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돈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속보를 내보내는 방송사와 그 방송 뒤에 광고를 붙인 광고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의력이라는 공유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주의력이 심각하게 훼손된 이 사회에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것은 바로 돈을 받고 고요한 시간을 되파는 이들이다. 크로포드는 공항의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 전용 라운지가 그토록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값비싼 가구나 맛좋은 음식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자신의 책에서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는 인간의 관대한 마음을 가장 귀중하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주의력은 인간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 만약 당신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정신을 집중했던 대상을 모두 지워버린다면, 도대체 뭐가 남아 있겠는가?


권위


미디어는 범람하고, 미디어에 대한 신뢰는 떨어진다. 언론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지만, 독자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우월감이야말로 '지식인들과 대중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연대감'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맑스가 말하듯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의는 신의로만 바꾸는 것"이 교환의 정의라면, 대중으로부터의 존중은 우리가 대중을 존중할 때 생겨난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이런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 대중들과 소통해 왔을까?



★★★★★ 많이 아쉽지만 응원하는 의미에서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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