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보던 유치원 선생님의 인사에 내 발걸음이 멈칫했다. 설마..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 그 인사는 내 앞에 서 있는 한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2년 동안 '어머님, 안녕하세요' 이외의 인사를 받은 적이 없다. 감정이 실리다못해 유명인을 마주했을 때의 격앙된 목소리로도 말씀하시는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선생님의 낯선 목소리는 내 눈 앞에 서 있던 ‘오늘 너무 예쁜 어머님’을 향했다. 내가 20대에도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은 그 어머님은 여성미 물씬나는 A라인의 검정코트를 입어 더 세련되어 보였다. 승무원 머리가 연상되는 올림머리는 정갈해 보이기까지 했다. 바람에 살랑이는 애교머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맑고 투명했다. 화장품을 과하게 바르지 않아 수수해보이기도 했다. 유치원 현관문 앞에서 인사하던 선생님은, ‘그 어머님’이 가실 때까지 “너무 예쁘세요.”라는 말을 쉬지 않았다.
유치원 현관문 앞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고등학교 때처럼 늘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이다. 어색하지 않은 지극히 익숙한 모습이다. 겨우내 내 복장은 까만 기모바지, 티는 자유롭게, 외투는 무릎까지 덮는 빨강 고어텍스 패딩점퍼다. 내 사전에 ‘멋보다 따뜻한 게 제일’이다. 겨울은 추워서 불편하지만 외투 하나만 입으면 안에 있는 옷은 굳이 신경 안 써서 편하기도 하다. 얼굴에 썬크림과 에어쿠션을 발라주긴 했지만 화장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머리는 그나마 빗질을 해서 지저분해보이지 않는 단발이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이런 내 모습은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내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두 엄마 사이에 한 엄마만 바라보며 칭찬을 연발하니 말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길 수 있었다. 솔직하게, 아름다운 그 어머님과 매일 교복입는 엄마인 나와의 외적거리를 인정할 수 있었다. 이유인즉슨, 나의 겉모습은 단지 ‘막옷을 걸친 사람’에 불과하지만 내면은 단단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점에 책이 있다.
책을 읽기 전의 나,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지극히 다른 사람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의 외모에 늘 불만이었고, 나의 신체적 장점은 내 자랑인 마냥 의식하며 다녔다. 어떻게하면 남들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까하는 생각으로 옷과 악세사리를 골랐다.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의 시선에 있는 이유다. 그러나, 매일 책을 읽는 지금, 내 안에 더이상 비교 잣대는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내가 되었나?'이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가? 그거면 됐다.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고 주도적으로 살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어머님은 그날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 어머님이 중시 여기는 삶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이 있다. 내가 꿈꾸고 바라는 비전이 있기에 내 마음은 늘 벅차오르고 즐겁다. 오늘도 나는 빨간 교복을 입고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