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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호박 Aug 18. 2023

자존감 브레이커 끝판왕, 엄마

비만인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무례함들

 내 자존감을 거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청소년기에는 혹시 나의 생모가 지금 다른 곳에서 살고 있고, 나와 함께 사는 저 여자는 사실 계모가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강하게 품었었다.

 그 정도로 엄마는 날 너무 심하게 짓밟았다.

 

 난 7살 위 오빠, 7살 아래 남동생을 두고 있는 가운데 콕 끼어있는 딸이다.

 아들 둘, 딸 하나라고 하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절대 아니다.

 엄마의 사랑은 두 아들들의 것이었지,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감정조절이 서툰 사람이었고 감정의 기복이 아주 널뛰듯 하는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종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의 육아에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두 아들들이 했을 때는 웃어넘겼을 것을 내가 하면 몇 시간이고 나를 때렸다.

 나도 한 성질 하는지라 엄마한테 그렇게 맞으면서도 단 한 번을 죄송하다, 잘못했다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잘못했다 하라는 건지, 심지어 내가 왜 맞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뭘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집이었다.


 오빠는 엄마에게 첫아들이니 귀한 건 물론이요, 의지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남동생은 늦둥이라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었다.

 나는 그런 귀한 두 아들 틈에서 남동생 숙제를 해줘야 했고,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내가 엄마에게 처음 맞았던 기억은 내가 8살이었던 여름의 어느 밤이다.

 왜 그렇게 엄마에게 맞아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날밤 엄마는 대걸레 자루로 나를 흠씬 두들겨 패다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옆에 있던 소주병을 깨서는 날 죽이겠다며 8살의 나에게 달려들었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이지만 그 여름의 밤이, 날 죽이려는 살기 어린 엄마의 눈빛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남동생의 방학 숙제를 내 앞에 쌓아두고 대신하라고 시키기에 못하겠다고 하자 동생 숙제도 못해주는 누나가 어디 있느냐, 다른 집 누나들은 동생 숙제를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다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의 말에 발끈해서 대체 어떤 누나가 그러는지 말해보라고 하자 감히 엄마에게 대든다며 현관에 있던 장우산을 들고 와 날 때리기 시작하더니 내가 끝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자 본인 화에 못 이겨 날 눕혀놓고 발로 온몸을 밟고 내 위에 올라타서는 내 머리카락을 잡고 뒤통수를 바닥에 찧어대기 까지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매타작을 벌이고 나면 늘 엄마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곤 했다. 난 엄마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아무리 아파도 '아'소리 한번 낸 적 없고, 죄송하다고 한 적도 없으며 운 적도 없다.

 그래서 늘 먼저 지치는 건 엄마였다. 엄마가 지칠 때까지 구타를 당하고 나면 내 온몸은 피멍으로 가득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건 그렇게 실컷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나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빗어주거나 멍든 부분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였다.   

 이런 폭력성 다분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엄마가 두 아들들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래서 난 엄마가 너무 싫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늘 '에이, 그래도 엄마인데 어떻게 그래. 네가 뭐 큰 잘못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엄마가 자식을 싫어할 수 있어. 너 그런 생각하지 마.'였다.

 모든 엄마들이 내 엄마 같지 않구나, 그래서 그들은 날 이해할 수 없겠구나라고 깨달았고 그 뒤로 난 웬만하면 내가 당했던 아동학대, 엄마가 나에게 저질렀던 범죄들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살았다.





 엄마는 내가 살이 차차 올라오기 시작한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갈 즈음부터 날 옥죄기 시작했다.

 살찌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여자는 무조건 날씬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한 번도 나에게 건강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권한 적이 없다.

 엄마에게 우선순위는 무조건 외모였다.

 어디 가서 딸을 소개했을 때, 엄마 자신이 자랑스러워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나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을 다녀온 후 체중을 재고 거실에 있는 큰 달력에 적어놓으라고 했다.

 온 가족이 내 체중을 알 수 있게 말이다.

 유아기 때부터 엄마의 기분을 거스르면 엄청난 매 타작이 쏟아지는 걸 경험했기에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재고 달력에 기록했다.

 조금이라도 체중이 늘거나 제자리걸음이면 어김없이 언어폭력을 쏟아부었다.

 옆에 있는 가족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게다가 매일 저녁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TV를 보거나 쉴 때 나에게는 앉았다 일어서기를 200번 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행동들이 모두 나를 위한 거라고 했다.

 엄청난 가스라이팅 행위였다.

 집에 손님들이 와서 인사를 하러 나가면 내가 손님에게 인사하기도 전에 엄마가 선수 쳐서 말하곤 했다.

 " 내 딸이야. 좀 뚱뚱하지?"

 누군가에게 날 소개하면서 늘 그렇게 ' 좀 뚱뚱하지?'를 꼭 덧붙였다.

 " 난 며느리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 우리 며느리 봤지? 키 크고 날씬하잖아."

  어딜 가나 올케언니와 날 비교했다.

  주말이면 대중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벌거벗은 나를 세워두고 사람들 앞에서 몸매 품평을 하며 살 빼라고 큰 소리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손님이 올 때 그냥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살찐 딸 보이기 창피하다고 나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렇게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오빠랑 올케언니, 남동생은 손님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출산을 거치며 살이 많이 오르자 엄마는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

 

 사위한테 내가 미안해서 용돈 좀 줘야겠다.

 딸년이 뚱뚱해서 내가 얼마나 사위한테 미안한데.

 용돈이나 좀 주고 룸살롱 가서 예쁜 여자들 끼고 놀다 오라고 해야겠어.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정녕 저 여자가 내 친정엄마라고?

 어떤 친정엄마가 사위 앞에서 저런 말을 하지?

 순간 화도 나고, 저런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에 낯 부끄러워져 얼른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는 여자가 살찐걸 무슨 죄악처럼 여겼다.

 길을 가다가 조금 살찐 여자만 봐도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저기 좀 보라고, 저 여자 엉덩이랑 허벅지 좀 보라고, 저런 몸을 들고 어떻게 길바닥을 걸어 다닐 생각을 하냐며 흉을 실컷 봤다.

 사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들은 엄마가 대단히 날씬하거나 마른 사람으로 알 것 같은데 이쯤 해서 이야기하자면 엄마도 뚱뚱한 사람이었다.


 사실 엄마와 나 사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을 훨씬 넘고도 남는다.

 난 삼 남매 중 엄마가 가장 만만하게 대할 수 있었던 자식이었고, 그런 이유로 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엄마의 육아방식 때문에 난 늘 눈치 보며 살아야 했고, 마음속에는 불신만 커져갈 뿐이었다.  

 딱히 나의 비만 때문만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진 거대한 벽이 엄마와 나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다. 오빠와 남동생은 밥만 먹어도, 물만 마셔도, 뭘 해도 칭찬만 들었고 난 어떻게 하면 엄마가 날 좋아할까 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게 집은 불편한 공간이었고, 내 인생 최대의 자존감 브레이커는 엄마였다.

 가장 만만한 자식이었던 나의 비만은 엄마에게 정말 맛있는, 잘근잘근 씹을수록 단물이 쪽쪽 잘 나오는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날 잘근잘근 씹어댔고 그럴수록 내 자존감 아니, 내 영혼은 서서히 망가져갔다.


 엄마는 5년 전,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끝내 나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난 일부러 엄마를 모신 곳에 찾아가지 않고 있다. 사실 엄마가 그립지도 않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꿈에 엄마가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발작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엄마가 나에게 남긴 상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나아질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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