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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Sep 06. 2024

붉은 치마, 흰 저고리

죽은 나무와 산 나무 22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들고 온 개운죽 한 다발.  오는 길에 좌판에서 나 주려고 사 왔단다. 내가 잘 키울 거 같아서 -그런가?  깡충한 개운죽 한단이 얼핏 대파단 같기도 하고 개운죽 이란 이름 그대로 대나무를 닮기도 했다. 행운을 준다니 벌써 좋은 기운이 번지는 기분이다.


유리병에 꽂아 두고 물을 갈아주며 마디에서 잎이 나와 시원하게 자라는 것을 보았다. 약간 붉거나 연한 베이지색의 수염뿌리가 서로 엉기면서 자라는 것도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여름 끝 즈음에 밑에서부터 노래지는 줄기가 있었다. 물속에 있는데도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마디에 붙어 새로 자란 초록 줄기를 떼서 다른 병에 꽂아주고 말라가는 것은 버렸다. 뿌리가 엉켜 찢어내듯 해야 했다.  

아직 싱싱한 것은 정리해서 컵에 넣고, 실내라서 마르나 싶어 밖에 내놓았더니 다시 더 싱싱하게 잘 자라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별 문제가 없는 듯 잘 지냈다.


하지만 뜻밖의 날에 겨울이 왔다. 밤사이 갑자기 기온이 확 내려간 거다. 준비할 틈도 없이. 심상찮았다. 얼른 실내로 옮겼다. 시간이 지나도 개운죽은 힘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바로 버리지는 못하고 뒷베란다에 내놓았다.


그렇게 잊고 겨울을 다 보낸 어느 날 베란다 구석에 있던 개운죽을 본 나는 너무 놀랐다. 누렇게 시들어 말라 있을 거라는 생각을 뒤엎고 하얗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잎과 줄기는 탈색을 한 듯 너무도 깨끗하게 티 하나 없이 원래 흰색 식물인듯 말라 있었다.


당기니 쑥- 뿌리가 빠지는데  헉!!  컵모양 그대로 뿌리가 한 덩어리로 굳어져 자체 화분이 되어 있었다. 붉은 실이 엉겨 주홍색 수세미인 듯 신비로웠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화분에 심어진 듯 개운죽이 그대로 서 있는 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주었다.


 하얗게 표백된 초록의 젊음이 그대로 멈춰 있다. 영혼의 잎들이 서로 화르르 웃는 듯도 하고 손을 흔들어 대는 것 같기도 하다. 아우성하는 붉은 뿌리에 박제된 삶의 순간이 서러울 듯도한데 오히려 폭신하다.


한없이 가벼워진 개운죽은 붉은 삼베 치마에 모시 저고리를 입은 듯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꼿꼿이 서있다.

못다 한 청춘 따위는 생각조차 안 나게  지금이 더  아름답다.

대나무의 이름을 빌린 게 그냥은 아니었구나  開運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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