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정애 Sep 01. 2024

넝쿨에게

죽은 나무와 산 나무 21

어쩌다 마를 심고 기대도 않았는데 싹이 나와 꼬물꼬물 머리를 흔들며 올라가는 게 어찌나 예쁜지 날마다 그것 들여다보는 기쁨으로 눈만 뜨면 베란다로 나갔다. 그렇게 나와 넝쿨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마 넝쿨이 자라면서 타고 올라갈 줄이 필요해서 낚시 줄을 테이프로 베란다 창틀에 붙였다. 요리 가려는 걸 저리로 이쪽으로 가려면 저쪽으로 너무 빨리 천정까지 가지 못하게 사다리 타기를 하듯 긴 코스로 유인했다.

그렇게 마 넝쿨이 만든 그물은 바람이 불면 불룩하게 밀리며 유대했다.


 더 많이 잎이 무성해지자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줄이 자꾸 떨어졌다. 붙이고 또 붙이는 수고에 베란다에서 키우기는 버거운 식물이라 생각을 했지만 초록색으로 덮인 창을 보면 그런 생각은 싹 잊어졌다. 게다가 마의 잎마디에 동그란 콩 만한 마가 열리는데 너무 신기하다.   


이듬해 봄, 이상하게 마 싹이 나오지 않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흙을 파보니 뿌리들이 진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것도 없었다. 아기 손가락 만하게는 자랐던 뿌리였는데 그런 게 언제 여기 있었느냐는 듯 거짓말처럼 흙뿐이었다. 추리를 해보니 물기가 많은 마가모두 썩어 녹아 버린 거다. 마 화분 위에다 다른 화분을 쌓아둬서. 겨울에도 흙이 숨을 쉬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빈 화분만 남았다. 


이사를 한 뒤에도 몇 년은 넝쿨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벽을 가득 채우는 초록의 넝쿨벽이 주는 풍성한 여름을 못 잊고 - 그것도 아파트에서 - 나팔꽃을 심어 보았다. 베란다가 없는 집이라 거실 에어컨에 의지해서 둥근 대나무로 넝쿨 올리기를 만들어 주는 정성도 들였다. 

'잠꾸러기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나팔꽃 아가씨 나팔 불어요 ' 노래를 하며 아침에 핀 나팔꽃을 맞이했다. 


다음 해에 유홍초 씨앗을 심었는데 시원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꽃 한 송이 필 때마다 놀라고 반갑고 무남독녀 외동딸인양 모두의 관심과 이쁨을 받았다. 그 한두 송이 꽃에서 받아 놓은 씨앗을 간직했다가 이듬해 심어 놓고 싹트기를 기다리는 행복도 있었다. 


 넝쿨은 자람의 속도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 더 큰 기쁨을 준다. 나의 넝쿨 기르기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잡고, 감고 더 멀리 자꾸 기어올라가고 싶은 넝쿨들에게는 막힌 천정을 만나고 더구나 미끄러운 유리나 벽을 더듬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여름 넝쿨은 보무도 당당하다. 벽과 담과 울타리를 장악한 돌격대와 같이 고개를 들고 빽빽이 뻗어나간다. 어디든 간다. 지붕도 전봇대도, 큰 나무도 막무가내로 다 덮쳐서 골치거리이기도 하다. 그래도 넝쿨이 있으면 아는 사람 만난 듯 반갑고 나는  너를 다 이해하고 있다는 착한 눈으로 보게 된다.   

넝쿨도 나에게 그럴까?  

어쩜 도망가고 싶을지도.



이전 21화 탱자 가라사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