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작가 Apr 08. 2021

억울한가요? 저도 그래요.

3. 당신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침범했어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 속에서는 새로운 만남이 있으면 떠나는 이별도 있는 법이니까.

어떠한 일이든 그 결과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거나 해결하지 않을 경우 같은 일이 반복되거나 변화 없는 삶이 지속된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환경, 주위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불평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며 살지 않는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종교의 선택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강요하거나 특정 종교를 선택해야 하는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정 종교인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진실을 밝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다고 했다.

자신이 보여준 삶은 모든 것이 진실된 모습이었고 말하지 않은 부분은 그 한 가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잘못된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삶마저도 거짓으로 읽히거나 사람들과의 소통관계에서 원활하지 못한 부분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이 과연 옳은 것일까? 선의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담겨 있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이 부분을 짚어 본다면 그들은 남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가?

 

 내 경우를 본다면 물질적, 금전적 피해는 없었으니 그들이 말하는 '선의'에 합당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정신적으로 힘이 들 때 그들이 나의 마음을 읽어주고 감정을 함께 공감해주었다.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도록 제안하거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자기 계발이라 쓰고 '성경공부'라고 읽고 싶다)

따지고 보자면  나는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금전적으로 피해를 입은 부분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억울하고 화가 나는 걸까? 그들이 억울하다며 미안하다고 할 때 그들을 애써 이해하려 했지만 그들의 억울함에 사실은 마음속 깊숙이 그 감정이 공감되지 않는다.


억울한가요? 나도 그래요!!

당신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침범했다는 거예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떠올랐다. 내가 마주치는 상황과 우연한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나만 빼고 모두 조작된 것이다. 에이전시를 통해 연애에 서툰 사람들을 대신해 연애를 이루어 주는 연애조작단의 내용이다. 연애라는 단어만 빼면 현실판 종교 조작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우연을 가장한 계획적인 만남이었고 나에게 소개해준 지인들은 모두 한통속(같은 목적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이끌어나갔다.

이끌려 가는 나는 그것이 특정 종교라는 것을 모른 채...


일단 한번 들어봐, 일단 한번 경험해봐, 그리고 나면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들은 그렇게 정체를 숨긴 채 그들의 논리로 오해를 풀어 나가려고 했나 보다.


 나는 과연 그것이 올바른 해결방법이었을까 의문을 가져본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이다.

또한 그 선택에 따른 문제는 그들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종교를 선택하였고 그 선택에 있어서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본다면 그것을 감당하거나 해결해나가기 위해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여러 이유로 오랫동안 쌓여온 부정적인 인식이 금세 좋아질 수는 없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있어서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는 종교를 떠나 인간관계 질서로 본다 하여도 '사기, 우롱'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믿었던 부분에 대한 '배신감' 이 크다.

그 배신감에는 '선택권 박탈감'도 있었다.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장소와 상황, 모든 행동에는 선택에 의해 일어난다.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등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한 셈이다.

그들이 가르치려 했던 '성경공부'가 무엇인지, 관심이 있는지, 배움의 뜻이 있는지 나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다.

내가 평소에 그 부분에 관심이 있었거나 알고 싶었다면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들은 묻지 않았다. 나의 선택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들은 원하는 목적에만 집중했을 뿐이었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은 선에서 자기 계발이라는 목적하에 배움의 자유와 선택권을 박탈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인간적으로 아주 괘씸하다.


억울하다고요?

곱지 않은 시선 그 하나가 억울한가요?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왜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등을 돌아서는 이유가 단지 특정 종교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돌이켜 보길 바란다. 인간관계를 그렇게 맺었어야 했는지 묻고 싶다.

종교인을 떠나 사회생활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계 대지 말고 '진실함'을 보여주길 바란다. 거짓은 결국 들통나게 마련이니까.


성장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늘 돌이켜 보며 수정해나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 앞에 마주한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며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앞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또다시 후회하는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 뚫려있던 빈틈을 이번 일로 인해 내면을 더 단단하게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론 아픔도, 후회도 있지만 경험은 늘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도 함께 있다는 것을 잃지 말자.

이전 06화 위험한 선의의 거짓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