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본가에 다녀올게요.”
지후가 노란색 20인치 캐리어를 끌고 침실로 쓰는 작은방에서 나왔다.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송이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내일부터 추석 연휴잖아요. 오늘 출발해야죠.”
“벌써 그렇게 됐나?”
놀란 척했지만 사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우울 측정기가 시도 때도 없이 울릴 거라는 염려가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다녀올게요.”
지후가 사무실을 나갔다.
철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송이는 옆에서 게임을 하는 동엽에게 물었다.
“넌 집에 안 가냐? 며칠째 여기에 있는 거야?”
“전 혼자 살아서 괜찮아요.”
동엽이 헤드셋 한쪽을 귀 뒤로 옮기고 답했다. 마우스를 쥔 토실토실한 손이 분주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데?”
“근처에 계세요. 아, 씨, 죽었네.”
“야, 욕 좀 하지 마. 가까운데 왜 따로 살아? 한 번 찾아봬.”
“됐어요. 아, 이, 똥컴. 컴퓨터 좀 업그레이드해 줘요.”
“그 컴퓨터는 그대로 둘 거야.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려.”
“싫어요. 전화하면 잔소리만 할 텐데.”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동엽은 총알이 난무하는 게임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삐이— 삐이— 삐이— 삐이— 삐이—.
갑자기 알람이 연이어 울렸다. 송이는 책상 위에 태블릿처럼 생긴 거치형 우울 측정기를 확인했다. 화면을 검지로 내려 주소지를 훑으며 한숨을 픽 쉬었다.
“에휴, 시작됐네.”
“뭐가요?”
“명절 증후군.”
“그게 뭔데요?”
“명절만 되면 우울해지는 거야.”
“왜요?”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하지, 그 고생해서 겨우 고향에 가면 고작 하는 게 뭐가 있어. 잔소리 듣기, 제사상 차리기, 술 시중들기…… 그런 것뿐이지. 어휴,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 아니냐?”
송이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흔들자 동엽이 혼잣말로 구시렁댔다.
“안 가면 되는 걸 왜 가서 고생이래.”
“너 같은 불효자가 뭘 알겠니.”
“그러는 누나는 고향이 어딘데 안 가요?”
“고향은 서울인데 부모님은 미국에 계셔.”
“아, 그렇군요. 근데 출동 안 해요?”
“명절 전에 증후인과 만나는 것보단 고향 갔다 와서 보는 게 효과가 좋아. 그때가 피크거든.”
“아, 네.”
“…….”
“…….”
또다시 대화가 끊기고 마우스와 키보드가 딸깍대는 소리만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무표정하게 우울 측정기의 화면을 넘기던 송이가 손을 멈췄다.
“근데 심심하긴 하다, 그치?”
“네.”
“도보 5분 거리에 증후인 한 명 떴는데, 갈래?”
동엽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모니터 화면을 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가시죠.”
속초에 도착한 지후는 입이 떡 벌어졌다. 2년 만에 온 속초는 지후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관람차가 돌고 바다에는 요트가 떠 있는 데다가, 땅에는 커피 가게가 즐비했다. 작년엔 행정고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안 왔는데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여기에 왔다면 행복에 젖은 여행객들에게 박탈감을 느낄 뻔했다.
[형, 저 속초 왔어요. 집에서 각자 저녁 먹고 만나서 한잔해요.]
때마침 고향에 와 있는 선배에게 카톡을 보내놓고 택시를 탔다. 외지인이 득실거리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인적이 드물어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는 여행객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새로 생긴 펜션과 횟집뿐이었다. 사이사이에 골조를 훤히 드러낸 공사 현장도 보였다.
지후는 익숙한 언덕길을 찾아 올랐다. 어릴 때 자주 놀러 간 김 씨 아저씨네도 펜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기와를 얹은 벽돌집이 보였다. 다행히 지후의 집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콩콩 발걸음 소리가 났다.
“어이구, 우리 아들, 어서 와라.”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가 지후를 반겼다. 굽은 허리 때문에 키가 한 뼘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요?”
“시장 갔다. 너 온다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가던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시라니까. 뭐 하신대요?”
“네가 게 안 좋아하냐? 게 잡아 오겠지.”
제 방으로 걸어가면서 지후는 집안 세간살이를 눈으로 훑었다. 2년 전과 비교해서 변한 게 없었다. 대학교 동창 누구는 부모님 댁에 로봇 청소기니, 식기세척기니 놓아드렸다는데 지후는 엄두도 못 냈다. 요샌 드물어진 통돌이 세탁기도 여전히 화장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입고 온 정장을 벗고 집에 놓고 간 옷 중에 아무거나 꺼내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가는 길에 안방을 기웃거렸다. 지후는 문지방에 선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5년 전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드린 전기장판이 방 한구석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집에서 바뀐 건 어머니의 늘어난 흰머리와 좀 더 굽은 허리뿐인 듯했다.
속상해진 마음을 다스리고 거실로 갔다. 애써 밝은 척하며 어머니와 안부를 나누는 사이 아버지가 시장에서 돌아왔다. 지후를 보자 환한 얼굴로 양손에 쥔 장바구니를 번쩍 들어 보였다.
“밥 먹자. 쿨럭, 쿨럭.”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지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사(壯士)로 이름났던 아버지가 다소 왜소해져 있었다.
“얼마 전에 감기 걸렸다. 젊을 땐 한 번도 안 걸렸는데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아버지가 껄껄 웃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손이 컸다. 킬로당 십만 원을 호가하는 킹크랩뿐 아니라 자랑하듯 한우라고 박힌 소고기도 2킬로그램이나 사 왔다. 내일 아침만 먹고 도망치듯 떠날 생각이었던 지후는 눈앞이 아찔했다. 이걸 해치우려면 못해도 점심까진 먹어야 할 듯했다.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사셨어요.”
장바구니를 뒤적이며 지후가 가볍게 투덜댔다.
“이거 다 네가 준 돈으로 산 거다. 네 돈 내고 네가 먹는 거야, 쿨럭.”
아버지는 재미난 농담이라도 한 듯 웃었지만, 지후의 눈에는 2년 전보다 더 깊게 팬 아버지의 눈가 주름만 보였다.
지후는 어머니가 서른일곱, 아버지가 마흔하나의 나이에 기적처럼 낳은 아들이었다. 부모님은 고된 바닷일을 하면서 지후가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이제 지후의 나이 스물일곱. 칠순을 앞둔 부모님께 지후가 보답해 드려야 할 때였다.
그러나 지금 제 꼴이 어떤가. 회사에 출근하는 기분을 내려고 정장을 입지만 사실 수입도 없는 비영리단체인 신드롬에서 일하고 있다. 송이가 활동 지원비라며 매달 백육십만 원을 주긴 하지만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마저도 아끼고 아껴서 오십만 원만 쓰고, 백만 원을 부모님께 보내드리긴 하지만 그 적은 돈을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그뿐인가. 지후 자신만 생각하면 지금 딱히 연애나 결혼 생각이 없다. 그러나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면 초조해졌다. 두 분이 더 늙기 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도 보여 드리고, 떡두꺼비 같은 손주도 안겨드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후는 바다에 잠수한 것처럼 갑갑함이 차올랐다. 고향 선배에게 카톡을 보냈다. 시간을 좀 당겨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어디 보자. 지영선이 어디 있나, 지영선이~.”
송이가 흥얼거리며 우울 측정기의 화면을 넘겼다. 동엽이 우울 측정기에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우울 측정기는 작동 원리가 뭐예요?”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설명은 해줄게. 이건 미세먼지 측정기를 개조한 거야. 광산란 방식으로 사람이 내뿜는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의 농도를 측정해. 공기를 레이저 불빛으로 비추고 빛이 산란, 회절, 굴절, 반사하는 정도를 광학센서로 감지해서 값을 도출하는 거지.”
동엽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증후인 정보는 어떻게 불러오는 건데요?”
“그건 전에 조수로 일하던 애가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어떻게 한 거라는데, 나는 잘 몰라.”
“조수가 있었어요?”
“응. 있었지. 네가 게임하는 그 컴퓨터 자리 주인.”
그 말에 동엽이 송이에게 바짝 붙더니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제 총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요. 그때 제가 조수 할까요?”
“이제 조수 안 둬.”
“아, 왜요오. 써주세요오.”
동엽이 몸을 비비 꼬며 비음을 냈다. 그러나 송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걸음 속도를 높였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단독 주택이 줄지어 나타났다. 철문 색깔이나 집의 외양만 조금씩 다를 뿐 대부분 생김새가 비슷했다. 송이는 우울 측정기에 뜬 주소와 집에 붙은 주소 표지판을 번갈아 확인했다. 그러다 동작을 멈추고 주차된 자동차 뒤로 몸을 숨겼다. 얼떨결에 송이의 뒤에 숨은 동엽이 물었다.
“왜 그래요?”
“지영선 씨가 나와 있어.”
동엽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 여성이 주택 앞 갓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들이 담장을 넘어 튀어나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아울러 가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여성의 표정은 세상만사가 따분하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동엽아, 시작하자.”
송이가 소리가 안 나게 손뼉을 치고 등을 더듬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스마일 건이 없었다. 컴퓨터 의자에 걸어두고 깜빡한 것이다. 송이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챙겨야 할 것을 빠뜨리는 건 당연했고 손에 든 것마저 죄다 흘리고 다녔다. 그래서 짐을 챙기는 건 항상 지후의 몫이었다. 문득 지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총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군대에서는 이럴 때 육탄전으로 갑니다.”
“육탄전?”
동엽이 벌떡 일어나더니 영선을 향해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영선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지영선 씨 맞으시죠?”
동엽의 물음에 영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엽은 지후에게 빌린 명함을 영선에게 건네며 지후에게 배운 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신드롬이라는 단체에서 나왔어요. 증후군을 겪고 있는 분들의 증상 완화와 심리적 어려움의 경감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거기다가 꾸준한 사후 관리도 해 드리구요.”
“……증후군이요? ”
영선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인지 동엽이 어버버하며 허둥댔다. 가만히 지켜보던 송이가 끼어들었다.
“추석 연휴라 힘드시죠? 가슴도 답답하고,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날 것 같고요.”
송이가 다 이해한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영선이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제야 경계심을 벗어던지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는 장을 보려고 집을 나섰어요. 대문을 열고 나왔는데 감이 예쁘게 열렸길래 그걸 보려고 고개를 들었어요. 근데 파란 하늘이 보이는 거예요.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져 있을까, 감탄하다가 그 자리에 앉아버렸어요. 친척들 것까지 12인분의 저녁을 차려야 해서 마음은 바쁜데 발걸음은 안 떨어지는 거 있죠?”
송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영선의 말대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파란빛이 시야에 담뿍 담겼다.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얼마 만인가 헤아려 봤어요. 대학교 다닐 땐 교정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자주 쳐다봤거든요. 지금 남편 된 사람하고 말이에요.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라서 부끄럽네요. 호호.”
영선이 수줍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스물네 살에 덜컥 애가 생겼어요. 남편은 자기만 믿고 결혼하자고 했어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는 뻔한 말도 하더라구요. 꿈도 많고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이 남자라면 괜찮겠다 싶어서 결혼했어요.
남편은 건설 현장을 전전하면서 돈을 버느라 바빴어요. 집안일은 물론 육아까지 제가 도맡아야 했어요. 그러면서 둘째도 생겼구요.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지만, 우리가 아무 기반이 없이 시작해서 그런 거라고 위로했어요.
둘째가 다섯 살이 넘어가니까 숨통이 좀 트이더라고요. 이제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남편이 이제 부모님께도 효도해야 하지 않냐면서 시간만 나면 큰집에 들르네요. 그래 놓고 자기는 왜 누워만 있는지. 장 보러 가자니까 다 보면 전화하래요. 차 끌고 데리러 온다고. 자긴 장남이라서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장남이 뭐 대수라고. 저도 집에서 맏이거든요. 저도 집에 가면 귀한 딸인데 여기만 오면 노비가 된 것 같다니까요.”
하소연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눈치를 보던 동엽이 영선의 말을 끊으려는데 송이가 고개를 저었다. 영선은 5분여간을 그렇게 더 떠들어 재꼈다. 그러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 정말로 장을 보러 가야 해요. 너무 늦어지면 어머님한테 한 소리 듣거든요.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시간 될 때 명함에 적힌 주소로 한 번 찾아뵐게요.”
영선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종아리까지 오는 쉬폰치마가 가을바람에 나풀거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얼이 빠져서 바라보던 동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죠?”
“그러게.”
송이가 우울 측정기를 봤다. 영선의 우울지수가 ‘나쁨’을 뜻하는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좋음’이었다.
“근데 확실히 표정이 좀 밝아진 거 같죠?”
“수다 좀 떨었다고 풀린 건가? 참나. 인간은 엄청 복잡한 것 같다가도 어떨 땐 참 단순하단 말이야.”
송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지후는 약속한 술집 앞에 섰다. 테이블이 네 개밖에 없는 단출한 가게였다. 뿌연 김이 서린 창 너머로 먼저 와 있는 광한이 보였다. 테이블 가운데는 기본 찬이 차려져 있고 초록색 소주병이 벌써 따져 있었다.
“선배!”
지후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손을 들어 보였다.
“요새 증후인이 줄었나 봐? 얼굴 좋아졌네.”
광한이 장난 섞인 농담으로 반겼다.
광한은 고향 선배이자 지후를 신드롬으로 이끈 사람이었다. 지후가 네 번째로 행정고시에서 떨어지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불쑥 찾아왔었다.
광한은 못 본 사이 뱃살이 불어 있었다. 하지만 눈두덩은 더 푹 꺼지고, 광대는 도드라졌다. 귀밑에 흰머리도 희끗희끗 나 있었다.
“형이야말로 얼굴 좋아졌네요. 역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해.”
그렇게 말치레하며 지후도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홍합탕과 파전이 나왔다. 광한과 이곳에 오면 항상 시키던 메뉴였다.
서로 8개월 만에 보는 건데도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술자리 레퍼토리도 똑같았다. 시작은 항상 둘이 처음 만난 날부터였다.
고시원 옥상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지후 앞에 광한이 대뜸 나타났다. 지후는 고향 선배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속마음을 토로했고, 심리적 안정을 주겠다면서 광한이 스마일 건을 쏴 주었다. 마술처럼 답답한 가슴이 가벼워지자 지후는 광한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때마침 직원을 구하던 광한이 신드롬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던 지후는 그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이야기는 둘이 함께 증후인을 찾아다닐 때로 이어졌다. 최영호 할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었다. 매일 죽어버리겠다고 뻥을 쳐서 지후와 광한을 꾀어낸 다음 술을 마신 위인이었다.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몇 번을 되풀이해도 꼭 같은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중엔 진경수 팀장님하고 송이 누나로 담당자 바꿨잖아요. 할아버지가 맨날 울먹거리면서 전화했어요. 누나 무섭다고.”
“송이한테는 절대 안 통하지. 근데 너 경수 형도 봤었구나?”
“진경수 팀장님이요? 제가 오고 얼마 안 있다가 나가시긴 했는데 뵙긴 했죠. 송이 누나랑 같이 신드롬을 만드신 분이라던데, 맞죠?”
“응. 맞아.”
“요새도 연락하세요?”
“아니.”
광한이 손으로 콧방울을 두 번 쓸어내리고는 술잔을 털어 넣었다. 지후는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에 턱을 괴고 꿈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돌아가고 싶네요.”
“너 나랑 옥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행정고시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네요. 저는 왜 항상 후회만 할까요?”
광한이 지후를 지그시 바라봤다.
“누구나 후회는 할 수 있어. 그다음이 중요한 거지. 미련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을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자양분으로 쓸지.”
지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광한이 위로하려고 한 말인 줄 알면서도 형은 취업을 했으니까 그렇지, 하는 못난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다. 오랜만에 광한을 만나 웃고 떠들며 잠시 잊은 삶의 숙제들이 다시 어깨를 짓눌렀다.
“형, 어디 회사에 다닌다고 했죠?”
지후의 물음에 광한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파란색 명함에는 하얀색 글씨로 회사 주소와 핸드폰 번호, 그리고 딜레마 영업부장 마광한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오~ 부장님.”
지후가 치켜세우자 광한이 코웃음을 쳤다.
“치, 무슨. 말만 부장이지.”
“영업부면 뭘 팔아요?”
“뭐, 이것저것 팔아.”
광한이 또다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지후는 더 묻고 싶었지만 썩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라서 입을 다물었다.
“넌 취직 안 하냐?”
이번엔 광한이 물었다.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지후가 우물쭈물하자 광한이 또 한 번 물었다.
“너, 그 일 좋아하는구나?”
“음……. 그런 거 같아요.”
“왜? 같은 증후인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어?”
광한이 놀리듯 말했다. 지후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 수줍게 웃었다.
“아니요. 송이 누나를 보면서 위안을 얻어요. 저 사람도 증후인이었을 텐데 저렇게 강하구나,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구나, 하고요.”
“송이? 그치, 배울 점이 많지. 하지만 곧 결정해야 할 날이 올 거야.”
“뭘요?”
“신드롬은 마치 꿈속 같잖아.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지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종일 발품을 팔아 증후인을 만나러 돌아다니고,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우면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드롬은 놀이동산 같은 곳이다. 고된 현실은 잊고 꿈과 희망만 가득한 나라…….
두 남자의 대화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연애하니 결혼하니, 집은 사니 마니, 애는 낳니 마니 하다가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님은 건강하셔?”
광한이 물었다.
“뭐 똑같으시죠.”
“혹시 부모님 건강이 염려되거나, 흠, 아직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오래 사시지 못하실 거 같으면 꼭 연락해라. 너는 내가 잘 챙겨줄게. 아이, 참, 술 먹으니까 내가 별말을 다 한다.”
광한이 자조적으로 픽 웃더니 또 혼자 술을 들이켰다.
술 한 병이 더 들어가자 무거운 공기는 금세 사라졌다. 전등이 내는 빛깔이 변하고 주변 풍경이 붓으로 칠한 것처럼 번졌다. 지후는 부모님 댁에서 느낀 갑갑함은 훌훌 잊고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빵빵 웃음을 터뜨렸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가게에는 지후와 광한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슬슬 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후가 말했다.
“형, 취직 축하드려요. 여태 그 인사를 못 했네.”
“축하는 무슨.
광한이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술잔을 채웠다.
“이제 일어날까요?”
지후가 일어서자 광한이 앞에 놓인 술잔을 끝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후는 광한을 부축해서 가게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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