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2. 인생 되감기
27살,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암 판정을 받으시고 1년이 조금 넘어서 돌아가셨죠. 병원에서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다고 했어요. 돌아가시기 2-3달전부터는 거동도 힘들어 지시고 종일 말없이 누워 계신 시간이 늘어갔죠. 어느 순간부터 아빠랑 대화한 시간이 없었네요. 말할 기운도 없으셨으니까요. 그렇게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돌아가시 기 하루 전달 호스피스 병동에서 심장이 서서히 느려지시며 조용히 숨을 거두셨죠.
유서 한 장, 어떠한 마지막 말 한마디 없으셨어요.
그게 못내 허전하더라고요. 몸이 달라지는 변화를 느끼셨을 텐데 남겨 주실 유서를 왜 안 남기셨을까. 어디라도 편지 한 장 남겨져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유품을 정리하며 집 안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진 않더라고요.
아빠와 평소에 이야기도 많이 했던 편이고 학창시절에는 아빠와 쪽지도 주고받고도 했지만 유서가 없는 아쉬움은 늘 마음 속 한 켠에 있었어요.
아이를 낳고 돌이 지난 무렵, 자료를 찾을 일이 있어서 다음 이메일 계정을 7년여만에 복구하게 되었죠. 오래 쌓인 메일을 하나하나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아빠의 메일을 발견했죠.
돌아가시 기 2년전 아빠는 문화센터에서 컴퓨터 기초를 배우셨어요. 그때 메일 발송 연습을 하시면서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던 거죠. 당시에 아빠의 메일에 일일이 답장은 안 했어요. 아빠가 메일 발송했다고 연락주시면 쿨한 답변을 보냈던 기억은 나요. “응, 메일 잘 왔어. 잘하셨어요.” 그 당시에 한 번 읽고 넘어갔던 메일을 부모가 되어서 다시 읽게 되었죠.
“네 뒤에는 항상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항상 건강에 유념해주어라.”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인생은 결코 힘들지 않는다.”
“싱그러운 아침 쏟아지는 태양 속에 시작의 내가 있다. 오늘도 좋은 아침.”
가물가물했던 아빠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어요.
‘그러게. 아빠는 평상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지. 엄청 감성적이기도 했고. 길가의 꽃 한송이 주어서 내 방에 놔두시는 분이었지.” 그 순간 이 메일이 아빠의 유서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자주 나에게 들려주었던 이런 말이 결국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셨겠구나 싶었죠. 못내 사라지지 않았던 서운함을 이렇게 풀게 되더라고요. 메일로 남겨져 있으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네요. 메일을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면서 결심했어요. 아이에게 엄마의 기록을 많이 남겨야겠다고 말이죠.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이야기를 남겨주고 싶어 졌어요. 그 결심을 하고 나자 오랫동안 저를 잠 못 들게 했던 걱정의 긴 꼬리가 싹둑 잘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본래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아니, 걱정이 많은 편이죠. 일어나지도 않을 일까지도 미리 앞당겨서 하곤 했거든요. 머리속에서 대하드라마 몇 편이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네요. 가능성이 없을 상상과 늘 싸우고 지던 시기였어요. 상상의 마무리는 늘 비련의 여주인공이 홀로 울면서 끝이 났죠.
몸 여기저기 아픈 구석이 많아서 병원을 자주 다니는 편이었거든요. 수술도 몇 번 했고, 약도 매일 꼬박 챙겨 먹어야 해요. 그러다 보니 건강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아이를 낳고 키우며 걱정은 더욱 늘어만 갔죠.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한 청승맞은 걱정부터 이런 위험한 세상에 아이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까지 있었죠.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는 모습까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두 돌이 될 무렵까지 밤마다 이런 기도를 했어요. 닥치지도 않을 미래의 걱정을 앞당겨 하느라 잠을 설쳤죠. 하루하루 아이가 커가는 기쁨을 마주하면서도 밤마다 걱정에 휩싸이는지라 잠을 설치기 일쑤였죠. 지금 돌이켜보니 청승맞음의 끝을 달리던 여주인공이 아닐 수가 없네요!
아빠의 메일은 제 걱정을 씻어주는 단비와 같았어요.
걱정할 시간에 부지런히 글쓰기를 하기로 했거든요. 하루하루 아이와 무슨 추억을 만들었는지,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고 어떤 공부를 했는지를 남겨보자고 생각했죠.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생생하게 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게 블로그를 자서전처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어요.
블로그를 다시 해보자고, 내 이야기를 남겨보자고 결심은 했지만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지속해볼지가 한편으로 고민이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중심이 단단하게 서지 않으면 또 흐지부지 될 수 있으니까요. 내 기록이 또 다시 별볼일 없는 흔적으로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세상 떠날 날을 앞두고 부랴부랴 남기게 되는 편지는 너무 슬프잖아요. 제 삶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남기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인생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고 아이에게는 엄마 자서전이 되겠죠.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자 매일같이 쓰게 만드는 든든한 러닝메이트가 되어주었죠. 혼자서 외롭게 쓰는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하루를 의미 있게 지내는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다음 날을 계획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죠.
주변 엄마들에게도 늘 말해주고 있어요. 블로그에 쓰는 의미를 명확히 찾아보라고요. 그게 없다면 이 블로그가 아이에게 물려주는 유산으로 생각하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매일을 좀 더 잘 살 수 있고 잘 기록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좀 슬퍼지나요? 무엇이든 미리미리 준비하면 생각처럼 슬프지 않아요. 오히려 하루가 조금 더 특별해질 수도 있답니다.
물론 오래 살면서 아이 옆에서 시시콜콜 엄마가 지내온 시간을 들려줄 거예요. 엄마가 어떻게 꿈을 이루어 가는지도 생생히 보여줄 거고요. 아이가 방문을 닫고 방황의 시간을 겪을 때 조용히 제 블로그 링크를 보내줄 계획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극복하고 이겨내 왔다고 말이죠. 아이와 다시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주고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면 참 좋겠네요.
그 마음으로 오늘도 블로그에 로그인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