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2. 내 인생 되감기
“나도 엄마처럼 그리고 싶다.”
아이 옆에서 뒹굴면서 그림 그리며 놀던 날,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그림은 동글동글 귀여워. 나도 엄마처럼 그리고 싶어.”
아이는 제 그림을 좋아해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어요. 저와 똑같이 그려지지 않을 때 책상을 쿵쿵 손으로 내리치거나 그리던 종이를 구겨 버리기도 했죠. 어린이집 친구의 그림을 따라 그려보려고도 부단히 연습했어요.
전 아이의 삐뚤 빼뚤한 그림체가 너무나 귀여웠지만 아이 눈높이는 꽤 높았나 봐요. 팔 다리가 정확히 제자리에 붙어있고 예쁘게 공주 드레스도 입고 색칠도 꼼꼼히 된 그림을 원했죠. 하지만 아이 마음처럼 완벽히 마음에 들 게 그려지는 순간은 많지 않았어요.
“엄마랑 다시 그려보자. 얼굴 그리고 싶으면 이렇게 동글동글 원을 먼저 그리고...”
“잘 안된다고!”
아이와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자주 전쟁이 벌어졌어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크레파스를 이내 놓아버렸어요. 눈물 그렁그렁한 채 그리던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린 적도 있었죠.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어느 날은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밤새도록 울면서 그리기도 했어요. 그런 아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매번 짜증을 반복하는 모습에 꾹 참던 화가 터져 나오기도 했죠.
“잘 그리고 싶어? 그러면 많이 그려 봐! 엄마는 처음부터 잘 그렸겠어?
학원에서 혼나면서 그리기도 했고 집에서도 엄청 많이 그려봤어. 연습을 더 해보면 되잖아!”
마지막 말을 내뱉는데 갑자기 머뭇거리게 되었어요. 아이에게 외치는 소리가 부메랑이 되어서 저에게 되돌아왔어요. ‘많이 연습을 하면 돼!’ 이 말이 마음 속에 쿡 꽂혔어요.
‘너는 이렇게 울면서 열심히 해봤니? 일찌감치 다 포기했으면서!’
그날따라 이리저리 뒤척거리면서 잠을 쉽게 자지 못했어요. 미대에 입학하면 꿈이 이루어지는 줄알았죠.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결코 잘하는 일로 쉽게 연결되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타고난 감각이 없기 때문,
잘 그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그럴싸한 이유를 억지로 찾고 있었어요.
그림을 못 그린다며 눈물 그렁그렁한 아이를 볼 때마다 불구덩이 화가 치밀어 올랐던 사실은
아마도 제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못 그린다며 스스로 포기한 제 모습이요.
그 다음날 제 발걸음이 서점으로 향했어요. 그림 그리는 책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 동안 아이 책만 쳐다봤는데, 제가 보고 싶은 책을 직접 찾아본 게 처음이었네요. 쉽게 그리는 방법, 캐릭터 그리기 등등 수많은 책들이 보였어요. ‘나도 이런 그림은 그릴 수 있겠다’, ‘이렇게도 표현해볼 수 있구나.’
오랜만에 그림을 ‘정말’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보니 어릴 적에 그림그릴 때 마냥 신이 났었는데 말이죠.
유치원 때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평생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집 앞에 작은 화실에 다녔는데 선생님이 쉬는 날에도 혼자 문 열고 들어가서 그리고 나왔던 적도 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화실 가던 시간만 기다렸죠. 커서도 계속 그림 그리라던 선생님 말씀도 기억이 나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10살에 집이 어려워지면서 왠지 미술학원에 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부모님의 지지로 중간중간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요. 우여곡절 끝에 미대는 갔지만 애초에 점수 맞춰서 진학했기에 전공부터 맞지 않았어요. 현실도 타고나게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죠.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더 분명해졌어요. 아무도 저한테 그림 그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포기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늘 찾고 스스로를 눈물 어린 가녀린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어요.
제 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상황 탓만 하고 있었네요. 못하게 될 일이면 안 한다고 생각해버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계속 생각나는 걸 보니 더 이상 미련 남지 않게 끝까지 한번 해봐야하나 봅니다!
아이와 그림 전쟁을 벌인 날 이후 계속해서 저의 그림 일대기가 떠올랐어요.
그림 그리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나, 포기했던 나, 아이에게는 노력해보라고 말 하면서 실상은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나까지. 마음 가는 대로 글 쓰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눴던 경험처럼 그림도 마음대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내가 이걸로 당장 사업을 할 일도 없고, 못 그린다고 세상이 무너질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 먹자 갑자기 손가락이 근질근질 했어요.
‘평범하면 어때, 어디서나 보는 흔한 그림이면 어때. 내가 계속 해본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괜한 용기도 불끈 생깁니다. 4B 연필을 사각사각 깎고 쓱쓱 잘 지워지는 지우개도 장만했고요. 제법 두툼한 스케치북도 한 권 샀죠. 많이 연습을 해보면 된다고 아이한테 외쳤잖아요? 제 자신에게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좋아, 신나게 많이 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