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Jun 20. 2022

이러다 확 늙는 거 아냐?

식물 홀릭

https://brunch.co.kr/@jsmbja/556

저번 글의 첫 문장이 "나는 이제 진심이다."였다. 이번 글의 첫 문장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이제 식물 홀릭이다." 아.. 어쩌면 좋지. 아침에 눈을 뜨면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바질이 얼마나 컸는지, 당근 싹들이 쓰러지진 않았는지, 방울토마토가 열렸는지 안 열렸는지 너무 궁금하다. 퇴근하고 오면 단 하나의 차이점도 없이 아침과 똑같은 점들이 궁금하다. 이렇게 아침이고 저녁이고 밤이고 화분들 앞에서 망부석이 된 듯 요리조리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를 보며 우리 남편이 나지막이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 아내 많이 변했네, 식물 하면 치를 떨더니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그 앞에 붙어있으니"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안 그래도 주변에서 계속 식물을 좋아하는 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라고 그러는데, 이러다가 나 진짜 훅 가는 거 아냐? 오.. 안돼, 나 아직 30대 중반이란 말이야.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대학교 제외) 졸업할 때까지는 날씬하고 생생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단 말이야! (계산을 해보자.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15년이 남았으니까 51세까지는 날씬하고 생생..... 응? 50대에는 생생은 아니고 여하튼 젊게 살아야 한다고!)


"남편, 나 이러다 훅가는거 아니야?"

"아이고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아내님은 동안이라 그렇게 훅 갈 일 없습니다."

 

흔히 떠도는 말로 남편은 뭘 해도 혼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몇 년을 꾸준히 혼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장족의 발전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 남편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저렇게 아내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하다니. 칭찬해.



오늘의 주인공은 란타난이다. 난 란타난으로 알고 있는데 이 화분을 처음 건네신 분은 란타나라고 하셔서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란타나"가 맞았다. 지금껏 모든 글에 란타난이라고 썼는데 이 글을 빌어 수정한다. "란타나"가 맞습니다. ^^;


정확히 5월 13일에 란타나 화분을 처음 받았다. 학교에서 스승의 날 기념으로 받은 것이고, 15일이 일요일이라 금요일 행사를 했기에 선명히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희미해질 테니 그전에 푯말이라도 만들어 처음 만난 날을 적어놔야겠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활짝 펴있어서 5월 한 달은 아주 예쁜 란타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전 글에서 확인 가능) 그런데 그 후로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자 란타나의 꽃들이 시든 것이든 안 시든 것이든 불문하고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바람 한 자락이 살짝 지나가도 우수수, 내가 지나가도 우수수, 물을 주는데 큰 줄기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우수수수수수 떨어져 끝내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되었다.


그 후로 계속 기다렸다. 다시 꽃이 피기를. 사실 가장 예뻤을 때는 마음이 이 정도로 가지는 않았는데 막상 다 지고 나니 너무 아쉬웠다. 말 그대로 든 자리보다 난 자리를 제대로 실감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앞에서 관찰했다. 어디 꽃봉오리가 안 생겼나. 여기도 살펴보고 저기도 살펴보고. 그런데 전혀 기미가 없었다. 정말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분명 란타나는 다년초라고 했는데, 한번 피고 죽는 종이 아니랬는데, 게다가 잎이 이렇게 무성하게 잘 자랐는데 생을 다했다고..? 그럴 리 없어!


아쉬운 마음을 정말 애써 다잡으며 기다리던 어느 날.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컸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꽃봉오리였다. 진짜 꽃봉오리 말이다! 야호!!!!!!!!!!!!!!! 누가 보면 산삼이라도 캔 줄 알았겠지만, 정말 기뻤다. 세상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나 조차도 낯설었다.

한 번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때 발견한 꽃 순이 10개이니, 한 순당 2개씩만 잡아도 봉오리가 대략 20개였다. 이 날 이후로 란타나는 쑥쑥 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내가 란타나에게 별칭을 만들어주었다. 바로 "나비꽃"
꽃이 활짝 피기 전에 웅크리고 있는 이 모습에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다.
두송이, 여섯송이, 여덟송이 .. 활짝핀 꽃송이들이 많을 수록 마음에 행복이 피어났다.
란타난이 더 맥력적인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꽃색깔이 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 란타나를 받았을 때 집에서 화분을 좀 키워보셨다는 직원분이 꽃순이 너무 많아 좀 잘라내야 할 것 같다고, 자신을 잘라낼 것이라고 하셨었다. 그 말을 듣고 식물 키우기에 영 소질이 없던 나는 나도 잘라야 하나.. 하고 고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안 자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난 화분 키우기에 서툴지만, 그래도 한두 달 키우면서 굳이 인간이 골라내지 않아도 살 것은 살고 죽을 것은 죽는다는 연의 섭리가 이 작은 화분에도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화분 앞에 앉아있다. 그 앞에서 한송이라도 더 피면 기뻐하고 못 봤던 꽃봉오리가 얼굴을 내밀면 행복해한다. 내 삶에 라이트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위에 꽃 사진들은 한 송이의 성장기처럼 보이지만 다 다른 꽃이다. 한송이를 매일매일 관찰하며 피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꽃들이 너무 예측불가이기에

진즉 포기했다. 그래도 각기 다른 꽃송이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피어나서 위와 같이 기록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방울이가 토마토를 맺었거나 당근의 뿌리가 주황색으로 변해 수확의 기쁨에 대해 기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작성하고 다음날, 꽃이 만개한 것을 발견했다. 노랑과 주황과 빨강이 참 아름다운 란타나. 두번째도 잘 피어줘서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기로운 우드 라이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