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을 떠나며

by 초부정수

9년 전에 시작한 일을 이제 일단 마무리하려고 한다. 사실 나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끌고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데이비드와 필립, 이안의 이야기와 시간들이 담겨있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대신 쌓이면 그 시간 속에 녹아있는 사실들이 또 다는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라의 선덕여왕이 당태종으로부터 선물 받은 모란꽃 그림을 보면서 그림에 나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란꽃이 꽤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선덕여왕의 판단에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덕여왕의 총명함을 높이 산다. 하지만, 동시에 의심도 하기 마련이어서, 아마도 그 그림은 4월 경에 그린 것이라 판단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모란은 대개 4월에 피지만 나비는 보통 5월 이후에 날아다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4월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면 나비가 없을 수 있는 노릇이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역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좋은 것이다. 하나의 사실이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며 그러한 상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처음에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당시에는 글보다는 만화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피부로 느끼기에 아직도 우리는 독서와는 거리가 멀며, 책을 대체하는 매체의 매력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주고 있어 어쩌면 독서 인구는 더 적어질지도 모른다. 만화를 만들면 그래도 사람들이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누군가 그것을 본다면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책 속에 나오는 것들, 예를 들면 비보풍수와 관련된 솟대를 잘 만들어 청계천 일대에서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손재주 좋은 사람들도 생길지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도 했었다.

솟대_삼공 윤세영 박사 작품

실제로 우리는 애니메이션 학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과 논의를 한 적이 있는데, 결론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학생들은 한자를 잘 읽지 못했고, 우리의 역사에도 그리 큰 관심이 없어서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만화로 제작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물보다는 동물이나 외계인과 같은 귀여운 캐릭터를 활용하여 혹시 만화가 잘 되면 캐릭터 상품을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돈을 벌 생각으로 시작한 일도 아니고 돈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벌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 정도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여 시범적으로 몇 컷 정도만 만들어 보고 계획을 접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두고 자기들의 생각을 마음대로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정도가 생길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스토리가 더 전문적이고 탄탄해야 하는데, 유감스럽지만 아직은 너무 많은 것들이 모자라다.


기획 당시 샘플로 만들어 본 만화 컷




하지만, 청계천은 사라진 적이 없다. 덮였고 가려졌을 뿐, 흐름을 멈춘 적이 없다. 이 글에 담긴 이야기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설명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결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나 청계천을 따라 걷는 동안 스친 장면과 감각이 시간의 층위 속에 놓이는 과정을 기록할 수 있다. 그래서 청계천을 따라 쌓인 시간은 과거로 물러난 기억이 아니라 지금의 도시를 지탱하는 퇴적이다. 이 로망스는 기념을 유보하며, 비극을 호출하지 않고, 향수를 재현하지도 않는다. 대신 기억을 일상의 높이로 낮추어 현재의 감각 속에 머물게 한다. 글은 마무리가 되어도 청계천은 다시 흐름으로 돌아가고, 도시는 계속 움직인다. 물이 지나가듯이 문장들 또한 그 흐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끝이란 흐름이 잠시 시야에서 벗어나는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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