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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Mar 31. 2023

지켜지지 않은 고과 약속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안하다, 정대리. 내가 정대리까지 챙길 수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임신 4개월, 입덧이 한창이던 때에 신규부서 차출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내 업무와 관련된 부서였다. 그리고 나는 차출 1순위가 되었다. 관련 업무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다른 일. 기존 팀이 마케팅이라면, 신규 부서가 속한 팀은 경영지원팀이다. 마케터로 입사해 마케터 경력을 쌓아온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인사 담당 임원에게 내 의사를 전했지만, 설득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가겠다고 할 때까지 부를 작정인지, 임원실에서는 매일 나를 불렀다. 입덧으로 지친 몸에 정신까지 피폐해져 갔다. 그때 옆자리 차장님이 말했다. "소령, 어차피 결국은 가게 될 거야. 그러니 차라리 고과 협상 기회로 삼아. 임신 중이라서 올해 교과가 불안하잖아. 상위 고과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옮기는 건 어때?" 과장 진급을 앞두고 출산을 해야 해 전전긍긍하던 때라 솔깃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신규 부서의 첫 구성원. 부서 세팅의 험난한 여정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자리다. 게다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계속해서 설득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고과 보장 카드를 내밀어도 될 만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다음 날 아침, 임원실에서 또 호출이 왔다. "9월 출산 예정이고 육아휴직도 1년 쓸 계획입니다. 그래도 상위 고과를 보장해 준다면 가겠습니다." "정대리, 잘 생각했어. 얼마든지 가능하지. 내가 그쪽 인사팀에 연락할게." "저도 그쪽 인사팀과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해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더니 "정대리는 그런 연락까지 할 필요 없어."라며 한사코 말렸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말았는데, 그게 실수였다.


사진: Unsplash의Alesia Kazantceva


인사이동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발령받고 보니 담당 임원 한 명과 실무급 대리인 나, 두 명이 전부. 첫날부터 둘이 마주 앉아 보고서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한 명씩 부서원이 채워질 때마다 교육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담당 업무를 나눴지만, 한동안은 내가 모두 관여해야 했다. 1인 2역, 3역을 소화할 수밖에 없는 날들을 살다 보니 출산휴가가 다가왔다.


출산휴가를 앞두고 가진 상무님과의 면담에서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상무님은 내 고과 약속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부서 이동과 동시에 나에 대한 고과권이 사라질 상무님은 나에게 고과를 약속하면서 실제 고과를 집행할 조직에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던 거다. 한 명을 보내겠다는 약속만 충실히 실행했을 뿐.


"걱정하지 마, 정대리. 내가 알아서 챙길게. 그동안 정대리 수고한 거 다 아는데." 부서에 둘밖에 없는 시절을 함께 지낸 상무님이니 이 말을 지킬 거라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온 고과 시즌. 아직 백일도 안 된 아이를 안고 건 전화에서 나는 미안하다는 답을 들었다. 순간, '투둑'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회사에게 나는 필요한 자리에 끼워 쓰고, 빼고 나면 필요 없어지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이 타이밍에 출산한 내가 잘못이라 생각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물을 수도 없었던 건 나의 휴직 이후에도 달렸을 팀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충분히 보상받아야 할 다른 이들이 많아서일 거라고 나를 달랬다.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정소령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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