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조용했던 캠퍼스는 개강과 함께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 활기를 되찾았다. 응급환자 없는 평화롭고 기이한 날의 응급실처럼 방학 동안엔 행정실도 한가하다. 한적한 기간이 지나고 3월이 오면 학사에 문제가 생긴 응급학생들이 밀려올 거라 긴장감의 벨트를 단단히 조여야 한다. 그리고 자칭 등록금의 노예라 불리는 행정실의 보조인력 조교들의 멤버가 교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 새로운 조교가 왔어. 인사들 해."
"안녕하세요. 김은정(가명)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반가워요. "
하얀 피부와 서글서글한 눈망울의 미혼인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대게 직원보다 나이가 어린 조교를 뽑는 것이 관행이지만 지원자가 적다 보니 늦깎이로 입학한 대학원생을 픽(pick)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20대의 어린 조교들과 다르게 김은정 신입조교는 옷차림부터 남달랐다. 나이와 맞지 않는 효도신발과 우리네 엄마들이 집에서 즐겨 입던 통 넓은 고무줄 바지가 그녀의 출근복이었다.
매주 화요일은 학과장 회의가 행정실 안쪽에 위치한 학장실에서 진행된다. 7개 학과의 학과장들 수업시간을 고려해 정한 회의는 점심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회의 준비 세팅은 물론이거니와 점심식사까지 회의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한다.
신박한 기억으로 남겨진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학장님의 요청으로 햄버거가 학과장 회의 점심메뉴로 정해졌다. 회의가 시작되기 30분 전, 학장실에 회의 세팅이 시작된다. 기자재 조교를 불러 빔 프로젝트와 컴퓨터를 연결하여 회의 자료를 띄워 놓는다.
"이조교는 김은정 조교랑 같이 교수님 드실 물이랑 필기구 좀 준비해 줘. 김은정 조교 새로왔으니까 이조교가 많이 알려주고."
동갑내기 신입조교는 나이는 많지만 사회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3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간단한 업무조차 생경하듯 대했고, 이름을 불러 시키기 전까진 전화조차 알아서 받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조교지만 동갑내기라 부리기가 꽤 조심스러웠다. 조교들이 회의 물품들을 세팅하는 동안 햄버거가 도착했다. 서둘러 학장실에 들어가 8개의 자리에 햄버거 세트를 하나씩 나열한다. 과장님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보자고 제안을 하신다. 반나체의 8개의 햄버거에서 풍기는 소고기 패티와 바비큐 소스는 조화롭게 엉겨 내 뱃속을 뚫고 들어와 고동을 울린다. 창문에 비치는 햇살이 눈부셔 블라인드를 쳐야 할까 생각하는 찰나였다.
"김조교, 지금 뭐 하는 거야?"
시선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르는 과장님에서 재빠르게 김조교 쪽으로 향했다. 학장님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려는 듯 집어드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과장님이 황급히 말리고자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김조교님, 여기는 각 학과의 학과장님이 회의하려고 준비된 자리예요. 특히 이 자리는 학장님 자리고요. 우리는 회의가 시작되면 행정실에서 준비된 점심을 먹을 거니까 앞으로 조심해 줘요."
"아, 네 몰랐어요."
민망한 듯 미소를 띤 채 입을 가리며 학장실을 나가는 동갑내기 그녀의 눈은 첫인상과 달리 맑은 광인의 눈처럼 느껴졌다. 과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 광경을 목도한 자들은 허탄하고 싸늘한 분위기에 이 눈, 저 눈 마주치며 할 말을 눈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듯 그녀의 어이없는 만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상식이라는 프레임 안과 밖에서 살아온 동갑내기 두 여자는 평행선을 이루며 간극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김은정 씨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떠났다. 다양한 자극과 충격을 안아줬던 신박한 그녀는 지금쯤 잘 맞는 사람을 만나 두 개의 선이 딱 맞붙은 일직선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문득 생각나는 하루다.
#한달매일쓰기의기적